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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이 대세인 세상에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이유를 찾는다.

by 보름달

곧 운동회다. 다른 종목이야 시작 전에 규칙을 듣고 즐기면 되지만 릴레이는 다르다.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을 요하기에 연습은 필수다. 연습 전, 여러 잔소리를 했다. 우선, 금지 사항 -앞머리 잡고 뛰기, 돌아보면서 상대 확인하면서 뛰기, 멍 때리다가 자기 차례 놓치기, 바통을 성의 없이 주거나 받아서 떨어트리기, 지고 있는 아이나 팀에게 야유 보내기 등등-을 말했다. 그리고 지는 것은 괜찮지만(사실 괜찮지 않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싫다고 하였다. 숨을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정도가 최선이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서 에너지를 쓰는 것이 최선이라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첫 달리기 연습 후, 나는 분노의 눈빛을 쏟아냈다. 뛰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인지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법도 쏟아내는 법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으로 뛰었기에 질책을 들으면서 세상 억울해했다.

"너희는 왜 전력으로 질주하지 않는 거지? 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거지?"

아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물었다.

"혹시 최선을 다했는데 선생님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한 거야?"

순간 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내가 본인들의 노력을 알아주고 공감해 주기 시작했다는 것처럼. 거기에 다시 찬물을 뿌렸다.

"그렇다면 너희의 최선과 나의 최선을 다른가 보구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말이지, 숨이 차서 아무 말도 못 해야 하고, 전력질주하다 보니 쉽게 멈출 수 없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뛰고 와서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또 바통을 넘기기 전에 바로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전력질주를 하지 않은 증거인데? 숨도 헉헉거리지 않고 잘 쉬는데? 그게 정말 최선일까?"

하나하나 꼬집으면서 사실 확인을 하는 나를 보며 아이들은 비통해하였으나 확실히 두 번째 연습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숨이 차지 않은 아이조차 헉헉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슬쩍 눈치를 보았다.


요즘 대세는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을 하는 것이다. 감정에 대해서도, 발달에 대해서도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객관적인 판단이나 기준을 경외시 한다. 개인이 점점 강조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다름을 인정하게 도왔지만, 기준점을 잃게 하여 객관화 능력을 상실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가장 중요하고 본인의 생각과 판단이 우선시된다.

<나쁜 교육>에서 짚고 있듯이 요즘 아이들은 감정과 느낌을 너무 존중받아서 오히려 툭하면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꺼낸다. 그리고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나에게 자기의 감정을 상대가 어떻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냐고 항의한다.

"한마디로 이제 무엇을 트라우마로, 겁박, 혹은 학대로 볼지는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의 일들이 내게 그런 것들로 느껴진다면, 그저 내 느낌을 믿으면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겪은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하면 이제는 그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가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거기다 최근 들어 정신질환을 진단받는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대학가의 공동체가 나서서 그들을 지켜주어야 할 필요성도 급격히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나쁜 교육> 52쪽 발췌.


옛날 엄마처럼 아이를 키운 나는 아이 무릎에 피가 나면 "피 나도 안 죽어."라고 별 거 아닌 듯 넘어가고, 피가 안 나면 "피 안나네. 괜찮은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외상에만 그랬을까. 사실 마음의 상처에도 담담하게 대응했다. "누구나 다 그 정도 상처는 받지.", "그 정도는 견디고 사는 게 인생이지.", "살아봐라.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으니까. 지금 못 이겨내면 어찌 살겠어." 등등... 누구나 그럴 수 있음을 강조했다. 공감해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정도는 참고 견디는 사람이 세상에 많음을 알려줌으로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고, 인내하고 견디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자기 객관화를 하게 돕고 싶었다. 비교함으로 상처주기 보다는 비교함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깨닫기 바랐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몰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내 감정에 매몰되다 보면 진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내 감정아 중요하고 옳다고만 한다면 상대방은 틀린 것이 되어버린다. 결국 상대방과 나의 간극은 커질 수밖에 없고 나는 맞고, 나와 다른 상대방은 틀리다는 혐오문화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객관적인 평가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을 견주어봄으로써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게 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자기를 객관화시켜 보면서 자기 판단과 평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확인하게 돕는다. 아동의 발달이나 성장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내 아이가 성장이나 발달 기준에 도달했느냐 빠르냐를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저 나이에는 저것을 하는구나를 앎으로 성장을 도울 수 있고 부족한 점을 깨닫고 나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주관적인 평가와 생각이 중요하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제발 주위를 돌아보면서 나의 생각과 평가를 재고함으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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