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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우리가?

경계를 짓는 순간, 마음에 날이 선다.

by 보름달

엄마 아빠의 직업을 의식한 탓일까, 자신의 미래 직업을 생각한 탓일까. 큰 딸은 요즘 부쩍이나 학부모들이 올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때로는 어이없어하면서 혹은 궁금해하면서 종종 나의 생각을 묻는다. 추석쯤이었다. 교사인 누군가 자신이 받은 학부모의 문자를 캡처해서 실상이 이렇다며 글을 올렸다 했다.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은 다양했다. '저도 난감하네요.' , '외국에 나와있어 도움을 드릴 수 없어요.'라고 답을 하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런 글을 올리는 것에 성인으로 혹은 직장인으로 일을 해결하지 못해 징징거리는 것이 이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냥 답변을 안 하거나 또는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해 주면 되지 않냐는 사람도 있었다. 호기심 가득 담아 날 보는 딸에게는 "그래도 이 부모님은 죄송하다고는 했네~"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급하면 그랬겠냐고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기대하지 않은 답이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문자, 사실 많이 받는다. 정말 급하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면 퇴근 이후 답변을 하지 않기로 한 학교 방침에 따라 답을 바로바로 하지 못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답하고 싶다. 얼마나 다급한 마음이었으면, 얼마나 난감하고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교사에게 문자를 보낼까 싶어서. 물론 가끔, 인사도 없이 원하는 바만 아무 때나 요구하는 것에 지칠 때도 있다. 주말에도 연휴에도 아무런 미안함 없이 원하는 것만, 궁금한 것만 틱 하고 문자를 보내는 경우도 많다. "체험학습 신청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오늘 우리 아이 목이 아프니까 웬만하면 발표시키지 마세요.", "우리 아이가 그러던데..." 등등 인사도 생략한 채 용건만 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기가 내는 세금으로 교사들의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니 당당 하게 요구할 수 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부모의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져서 교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엄마가 세금으로 월급 주잖아요. 치킨 사주세요."라고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교사들은 점점 더 '거기까지 우리가 해야 해?'를 외친다. 교사가 하는 일은 '교육'이지 '보육'은 아니라며 철저하게 선을 긋는다. 아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도, 신발끈을 못 묶어서 질질 끌고 다녀도 그냥 둔다. 한 겨울에 반팔을 입은 아이를 봐도 그냥 두는 것도, 다른 아이를 방해하지 않되 조용히 아무것을 안 하는 아이에게 잔소리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괜히 건들면 민원이 들어온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해야 하는 의무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 그들은 어디까지를 교사의 일로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반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내 새끼 같이 예뻐하는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내 새끼니까 옷 챙겨 입히고, 머리 빗기고, 못하는 부분을 끊임없이 잔소리해서 나아지게 하고, 혼도 낸다. 집에서 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교실에서도 우리 반 아이들을 키운다.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주고받고 삶의 태도를 가르는 치는 것이라 믿기에 어디까지만 해야 한다는 한계를 둔 적이 없다. 배움이 앎이 되고 앎이 삶이 되기 위해서 함께 할 뿐이다. 나의 경계 없음을 경계하고 비난하는 부모도 동료교사가 있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에게만큼은 진심인 것을.


무엇이든 이것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 나아가는 것을 거리끼게 된다.

여기까지는 교사가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모, 이것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교사 사이에 경계가 생기면 결국 이익을 따지게 되고 서로의 권리만 찾게 된다. 의무를 요구당하면서 권리가 침해당할까 날을 세운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아찔하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고 해줘야 하는 가를 따지는 마음을 접고 서로를 믿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안 되는 것일까.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며 마음을 나누면서 조금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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