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초, 유자차 그리고 김치, (몰래 먹는 스콘)
스물이 되고 서른 하나가 될 때까지, 나는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자매 넷이 알콩달콩 부대끼며 산 것이 나쁘지 않았고 삶의 80%를 일터가 차지했기 때문에 안락한 '집'과 편히 쉴 수 있는 '내 방' 보다는, 사무실의 내 책상이 더 귀한 공간이었다. (어랏,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회사가 정신적으로 집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네. 갑자기 씁쓸해지네. 쩝)
긴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뒤, 은평에 작은 옥상이 딸린 여덟 평의 원룸을 갖게 되었다. 처음 생긴 나의 자리, 페인트도 칠하고 옥상 텃밭도 가꾸며 그 쪼매난 공간 안에서 3년 동안 삶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써 내려갔다. 매번 갖고 싶다 생각만 하던 공예품에 (조금 비싸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온라인으로 캡처만 해 두던 동화책이나 예술책들도 하나씩 사서 방에 들이기 시작했다.
거참, 소비도 시즌에 맞추어 참 즐겁게도 했다.
봄을 기다리는 3월에는 다기세트나 커피 도구를 사고, 좋은 햇차와 싱그러운 커핏 가루를 찾아다녔다.
한 여름엔 예쁜 화분이나 식물들을 샀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하지만 너무 예뻤던) 물통 조리를 발견하고 땡볕 언덕을 기어코 기어 올라가 당근거래를 성사시킨 기억도 난다.
가을엔 옥상을 조금 더 즐겨야 할 테지. 냄새나지 않은 바베큐 그릴을 사고 어둔 옥상을 밝힐 랜턴도 샀다.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빨강 초록색이 많이 들어간 그림책까지 사고 나면, 그 연말, 마음이 그리 따뜻할 수가 없더랬다.
돈 참 많이 썼겠수, 친구들의 핀잔과 여기저기 미니멀리즘의 단어들이 오가는 세상 속에서, 잠깐 마음이 움찔 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이 의미 있는(?) 소비가 나의 일 년 치 삶에 깨알같이 끼어 들어가 기어코 삶의 풍요로움을 열 배로 끌어올리는데 성공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 어쩌면 오천 원어치 빵을 사고 오천만 원어치의 덤을 받은 기분이다. (이 정도면 이익 아닌가?)
봄 내내 툭하면 동네 친구와 평상에 누워 하늘을 봤다. 살랑살랑 푸른 바람을 곁에 두면 햇차와 커피가 빠질 수 없다. 홀짝홀짝, 그렇게 3월의 소비는 이미 본전을 뽑은 거다.
예쁜 식물들은 너무 예쁜 물통 조리 덕분에 쑥쑥 잘 자라서 한줄기 두 줄기 친구들에게 나눔까지 했고 그것들이 남의 집에서도 잘 살고 있다는 사진을 받을 때면 세상은 이미 나의 것이 된듯했지!
냄새나지 않은 바베큐 그릴 덕분에 날이 좋다면 좋은 대로 평상에서, 춥다면 춥다고 방 안에서 많이도 구워 먹었다. 그림책과 예술책들은 놀러 오는 친구들이 한 권씩 뽑아 읽고 빌려 가기도 했고, 조카들이 놀러 오면 함께 읽기도 했다. 동화책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안부로 늘 내게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런 순환이 좋았다.
작년 이맘 때쯤에는 퇴근 후 평상에 누워 멍 때리던 시간이 많았다. (퇴사하기 몇 주 전이었고 너무 큰 프로젝트로 마음 부담이 컸었다. 게다가 대학원 지원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못해 긴장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11월의 은평은 조금 춥긴 했지만 줄곧 하늘이 맑아 별들이 가득했다. 이곳 하늘도 별이 가득이긴 한데 날씨는 배신(!)이다. 11월인데 벌써 마이너스다. 어제와 오늘, (가을 어디 간 건가요) 급기야 펑펑 눈까지 내리더니 곧 녹을 줄 알았던 눈가루가 종일 세상을 덮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요란한데, 날씨가 한몫 더 얹었다.
예쁜 거 좋아하는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주머니 사정은 그리 넉넉지 않아도 분위기는 내자며 친구들과 길을 나섰다.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며 예쁜 소품들에 감동 한번, 온 가족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쇼핑하는 알콩달콩한 모습들에 또 한 번 감동. 여기저기 깨소금 볶는 내가 물 밀듯이 밀려왔다.
조카들이 떠오르는 장난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고, 동생 사주고 싶은 크리스마스 리스 앞에서 만지작만지작 거리기도 했다. 특히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매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마시는 크리스마스 달력 tea 앞에서는 살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며 티백을 매만졌는지 모른다.
나의 소비 목록이 대부분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더 절실히 느꼈다. 물건이 예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사고 싶긴 하지만, 오천 원의 즐거움이 오천만 원어치가 되는 과정에는 늘 함께 나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 아직 그런 관계를 만들지 못해서였을까. 그래서 결국 사서 들고 온 건 겨우 크리스마스 카운트다운 초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급 마음을 먹었다. 나만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정신 제대로 채울 따수운 무언가를 소비해보자. 아시아 마켓으로 직행했다. 그래, 올 겨울엔 '유자차'와 '김치'만 있으면 돼!
믹서기가 없어서 양념을 조스다가 어깨가 나갈 뻔했지만 그래도 김치 두통을 만들었다. 간 보다가 너무 맛있어 반절은 먹어 버린 듯. 유자차 끓일 때 한 움큼씩 같이 넣을 생강도 절편 썰어 얼려 두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에 이것만큼 뿌듯한 것이 없다며 김치 두통과 생강을 보고 흐뭇해져 혼났다.
마흔이 되어 유학 오길 잘했다. 살아온 경험들이 낯선 삶을 더 친절하게 관찰하게 하고, 온만 풍파 다 겪으며 모양 잡힌 내 안의 감성들이 낯선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공부의 어려움은 여전하지만 이런 풍요로움 덕분에 두려운 건 없다.
12월 크리스마스 준비는 순탄하게 따뜻하게 채워지고 있다.
사실 김치와 유자차가 다했다.
그리고 빠질 수 없지. 늦은 밤, 혼자서 몰래 만들어 먹는 스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