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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Aug 27. 2024

조금씩 선명해지는

성공하자 책모임 3_자살론/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



    자살이 나와 먼 곳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갓 스무 살이 된 고등학교 후배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문자의 내용이 진짜인지 장난인지 꽤 오래 생각했다. 장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가 진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장례식장으로 달리며 생각했다. 허탈하더라도 웃으며 뒤돌아 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장난이어도 이번엔 금방 용서해 주겠다고. 하지만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돌아 설 수 없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나니 터질 듯 두근대던 내 심장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젠 유족이 된 그들 앞에서 나의 슬픔은 너무나 미미했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와있던 친구들과 함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뛰는 가슴을 붙잡고 달려올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워낙 작은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그 친구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꽤나 가깝게 지냈다. 동아리 특성을 살려 결혼식 사진도 찍어주고 간혹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기혼자였던 그 친구와 미혼자였던 나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결혼으로 달라진 삶의 변화를 공유하고 이해할 만큼의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그런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나는 너무도 조용한 장례식장 구석 자리에서 우리가 소원해진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못하던 그 식탁 앞에서 나는 혼자 여러 추측과 판단을 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회가 그 친구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답이 없는 질문만 가득 안은 채 죽은 친구의 얼굴을 보러 갔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그 친구의 가족들이 침대 주변을 둘러섰다. 이제는 살아 있지 않은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침대 위, 하얀 이불을 덮고 있던 파란 얼굴. 어디선가 들리는 염불 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여 하나의 음률을 이루고 있었다. 그 소리에 나는 잠시 정신이 몽롱해져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늦은 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이제야 내 슬픔도 미미하지 않다는 안심이 되었는지 옆에 함께 가고 있던 친구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때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꽤 오랜 시간 이 책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너무나 직관적인 이 책의 제목에 기가 죽어 선뜻 시도해 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꼭 읽어 보리라 자주 다짐하곤 했다. 


‘자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나는 그 친구가 떠오를 때면 뒤르켐의 주장이 함께 떠올랐다. 그가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이 주장이 친구의 죽음을 부정하기보단 이해할 수 있게, 탓하기보단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회가 주는 영향과 역할에 대한 분석이다. 사회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라고 인식되던 자살을 치밀하게 파헤치고 비교하고 분석하여 그것이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더욱 과학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살이 인간의 삶이 어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살을 통제하는 방법도 생존 경쟁을 덜 어렵게 하고 삶을 더 쉽게 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과거보다 오늘날에 더 많은 자살이 일어나는 것은 오늘날에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더 애써야 하기 때문도 아니며 우리의 정당한 욕구가 덜 충족되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정당한 욕망의 한계를 모르고 있으며 노력의 방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p,521)


학문의 진보는 그 학문이 다루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가에 달려 있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결국 모든 것을 예상하는 계획을 미리 세우는 것보다는 단호하게 일에 착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라는 의미심장한 포부와 함께 끝을 맺는다. 그리고 본인의 말처럼 단호히 착수한 과학적 탐구(엄청난 범위의 수적 계랑과 사례들)를 바탕으로(당대에는 획기적이었을)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직업적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직업 집단이 개인들의 도덕적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잘 조직된 사회에서 개인적 이익에 대한 사회적 이익의 우월성과 권위를 노동자 조합이 대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또 다른 관점에서 직업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하여 언제 어디서나 있으며 생활의 대부분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삼중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p.510)


‘강자에게 힘의 사용을 절제하게 하고, 약자에게 끊임없는 저항을 자제하게 하면서 양자 모두에게 상호 간의 의무와 전체의 이익을 상기시키고 경우에 따라 생산을 억제하여 병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규제함으로써 조합은 욕망을 조정하고 나아가서 그 한계를 정해 줄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도덕적 규율을 확립할 수 있다.’(p.516) 


‘인간은 개인보다 우월한 소속 집단이 없으면 높은 차원의 목표나 규칙에 종속될 수 없다. 개인을 모든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개인을 방치하는 것이며 개인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p.526) 


뒤르켐은 조합에 대해 꽤나 강하게 주장하는데, 당시 ‘자살은 질병의 일환이며 부도덕한 행위’라는 뿌리 깊은 인식에 완벽한 전환을 원했으며, 현대사회 이전에 그나마 자살률을 낮춰 주었던 ‘신앙과 가족과 정치적 사회’의 성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화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강력하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을 테니까. 그러나 2024년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 대안은 잘 와닿지 않는다. 가장 먼저 이런 의문이 든다. ‘잘 조직된 사회’라는 것이 가능한가? 또 한편 직업이 없는 나에게 ‘조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커다란 사회적 구조 속에서 나는 조합도, 단호한 실천도, 사회를 잘 조직할 힘도 없는 한낱 보잘것없는 시민이니까. 허무함이 물 밀듯 밀려오려고 하는 찰나, 뒤르켐은 이런 나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한다.


‘은둔과 성찰은 주변에 대한 무감각, 허무의 명상에 빠지게 한다’


10년간 읽지 못하고 품어 오기만 했던 이 책을 친구들과 읽어내며 생각했다. 뒤르켐이 부활시키기 어렵다고 했던 ‘특수주의자(지방주의자)’가 되어 보자고. 더 작은 규모로, 더 낮은 곳에서. 작은 대학을 함께 다니고 마을 어딘가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들과 무겁게만 느껴졌던 이 책을 비로소 읽어냈다. 오랫동안 이 책을 읽고 싶었던 만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그 친구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작고 작은 이 만남이, 이 행위가 아득하게 느껴지던 일들을 조금씩 선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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