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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들 Oct 02. 2022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의 한 단어

비탄(悲歎)

 행복한 일이 생길 때에는 그 감정을 오롯이 즐기려 한다. 감정은 익숙한 존재라 이전보다 큰 감정을 다시 듣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의 감정을 나누고 함께 즐기며 더 큰 울림으로 느끼려 한다.


 그러나 삶이 때때로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순간은 늘 존재한다. 그럴 때 나는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이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언젠가부터 속눈썹이 내려앉은 듯한 작은 고통만 와도 눈물로 질식할 거 같은 순간이 생기곤 했다. 나의 어느 것이 이렇게 만든 것일까. 찾을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위해 순간을 잘게 나누고 뜯어서 이름표를 붙였다. 내 잘못이 아닌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니 고통은 사채처럼 불어갔다.


 이 시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도 내가 그러한 슬픔에서 침잠하고 있을 때였다. 해결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막아도 나에게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 반드시 모든 일에 인과가 분명하고 원인이 뚜렷한 것은 아니다.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라고 생각한 순간 나를 누르는 슬픔의 반은 휘발했다. 슬픔과 비탄의 원래 크기만큼만 슬퍼하고 힘들어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할 것 같은 슬픔에도 소비기한이 있다. 내 슬픔을 계속해서 곱씹고 고통받는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먹는 것처럼 내게 고통만 줄 뿐이다. 손톱만 한 슬픔에는 손톱만큼만, 허벅지만 한 슬픔에는 허벅지만큼만 슬퍼하자.


 완전히 잊는 것이 아닌 그 크기만큼의 슬픔만 감내하자. 눈물을 딛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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