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뒤늦은 리뷰_영화 서브스턴스

by 온화

엘리자베스가 화장을 고치는 장면

몸이 갈라지고 피가 낭자하는 장면이 서브스턴스에서 차고 넘치지만,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동창과 8시에 약속을 잡았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는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자신의 클론인 수의 젊고 아름다운 사진이 자꾸 눈에 밟힌다. 처진 가슴을 가리고 싶어 스카프를 맨다. 주름을 가리고 싶어 파운데이션을 바른다. 생기가 더 돌까 싶어 더 진한 립스틱을 꺼낸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은 여전히 늙고 추하다. 엘리자베스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부빈다. 아이라인, 쉐도우, 립스틱, 파운데이션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엘리자베스는 화장 얼룩이 진 자신의 얼굴을 본다. 분이 가시지 않아 이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이 장면을 소설처럼 공들여 묘사한 이유는, 서브스턴스의 핵심 주제인 자기 혐오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엘리자베스처럼 자신의 얼굴에 불만족한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얼굴 크기가 더 작았으면, 코가 더 짧고 오똑했으면, 눈의 쌍커풀이 더 진했으면, 턱선이 더 날렵했으면, 피부가 더 하얬으면’ 이런 생각 말이다. 슬프게도 얼굴은 우리의 바람과 노력대로 달라지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얼굴의 단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남들이 신경 안 쓰인다고 진심으로 말해도 소용없다. 내 눈에는 그 콤플렉스가 선명히 보이고, 나한테는(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남들에게 아름다워보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리려 애쓴지만, 고칠수록 자신은 더 흉물스럽게 보인다. 이 장면에서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이 못생기고 늙어 보일까 싶어 생기는 두려움과,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외모를 향한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느끼는 좌절감,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픽션이 아닌 우리의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엘리자베스가 중단 약물 주입을 멈추는 장면

엘리자베스가 수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가 서브스턴스 실험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일주일 교대를 지키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등에서 뇌척수액을 뽑아갔다. 수가 엘리자베스의 뇌척수액을 뽑아갈수록 엘리자베스의 신체는 망가져간다. 신년 전야제 쇼에 깨어난 엘리자배스는 노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끔찍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종료 약물을 수령한 다음 수의 몸에 주입하나, 차마 약물을 끝까지 투입하지 못한다. 수가 사라지면 마귀같은 자신의 형상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자신이 갈구하는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자각한 엘리자베스는 수를 살리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심폐소생술을 한다.


이 장면에서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자신이 싫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토로한다. 이전까지 엘리자베스는 분에 받혀 자신의 전성기 모습을 담은 스노우 글로브를 부순다거나, 자신의 화장을 반복해서 고치는 행동을 통해 자기 혐오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출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싫어’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뱉으며, 자기 혐오의 감정을 스스로 시인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차원이 다른 처절함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 시점에서 엘리자베스의 감정은 자기 혐오를 넘어 자기 부정의 단계로 접어든다. 엘리자베스는 수가 깨어난다면 또 다시 그녀가 서브스턴스 규칙을 어기며 뇌척수액을 뽑아갈 거고, 자신은 근육도 뼈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되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이제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여기서 더 어떻게 망가지든 상관없다. 수라는 클론의 아름다움만 남아 있으면 된다는 심정이 그녀의 선택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생존이 아닌 아름다운 외모로 남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이러한 극한의 상태까지 감정적으로 내몰리게 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이 비극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관객이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엘리자베스가 요리하며 수를 비웃는 장면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 서브스턴스 직원은 지겹도록 강조하지만, 이미 수와 엘리자베스는 원수지간이 된 지 오래다.


이 장면에서 수의 뇌척수액 남용으로 급격히 노화가 진행된 엘리자베스는 텔레비전을 통해 사전에 녹화된 수의 방송을 본다. 토크쇼에 출연한 수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가족관계와 성장배경을 꾸며낸다. 자신 이전에 쇼의 진행자였던 엘리자베스를 진행자가 언급하자 수는 그녀의 쇼는 구식이었고, 자신과 엘리자베스는 전혀 다른 세대라고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한물 간 연예인으로 비꼰다. 악에 받힌 엘리자베스는 ‘내가 없었으면 너도 존재하지 않았어’라고 소리지르며 요리로 분풀이를 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수와 엘리자베스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배은망덕한 수를 혐오하고, 수는 늙고 추한 엘리자베스를 혐오한다. 라이징 스타인 수가 인기 토크쇼에서 공개적으로 엘리자베스를 조롱하는 반면, 마귀와도 같은 형상의 엘리자베스는 집에서 혼잣말을 하며 수를 조롱한다. 이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의 격차가 확연히 드러나고, 같은 자아에서 비롯된 두 존재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이 장면은 앞으로의 전개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가 수십 개의 계란을 믹서기에 돌리는 모습은 세포 분열이 폭주해 탄생한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존재를, 재료를 거칠게 손질하는 도중 닭의 내장이 튀어나오는 장면은 그 괴물이 맞이할 비극적 최후를 상징한다. 극한의 대립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혐오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어떤 파국이 닥치는지까지 예고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연출력에 감탄하게 된다.


둘의 위상과 처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도, 같은 자아에서 나온 둘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 분명해져서 마음이 씁쓸해지는 장면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름 최고의 도파민, F1 더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