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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Jul 19. 2024

길모어 걸스

로리 길모어를 변호하다


로리의 성장통

'길모어 걸스를 계속 본다'는 말은 곧 '로리와 함께 커간다'의 행동과 일맥상통한다. 시즌 1부터 3은 로리의 칠튼 고등학교 시절을 다루고, 시즌 4부터 7은 로리의 예일 대학생 시절을 다루기 때문에, 길모어 걸스 시청자는 자연스레 로리의 성장기에 몰입하게 된다. 사실, 성장기보다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칠튼 고등학생 로리는 완벽하고 이상적이었던 반면, 예일 대학생인 로리는 커다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며 방황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길이 너무 확고했던 한 영특한 아이가 점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 서사는 분명 '일반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길을 헤매다가 길을 찾아내는 성장 서사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로리의 몰락'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이 조회수 100만회를 기록할 만큼, 길모어 걸스의 애청자는 로리의 변화를 '캐릭터 붕괴'로 명명하며 안타까워한다. 나아가 '누가 로리의 몰락에 책임이 있는가?' (무능한 작가 때문인지, 로리를 오냐오냐 키웠던 로리의 가족 때문인지)를 주제로 팬들은 격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로리를, 그리고 로리의 캐릭터성을 변화시킨 작가를 변호하고 싶다. 로리의 방황은 우리의 현실과 지극히 닮아 있기 때문이다. 로리는 많은 전공 수업을 수강했다가 감당할 수 없는 학습량과 학업 난이도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언론사 인턴으로 취직했다가 저널리스트의 자질이 없다는 현직자의 비판을 받고 무너진다. 뚜렷한 목표을 지닌 채 앞으로 달려나가는 또래 동기들에게 박탈감을 느낀 다음 휴학을 해버리고 만다. 꼬이기고 하고 그릇되기기도 하는 인간관계에 속상함을 느낀다. 

10년 전에 제작된 드라마의 스토리라인이지만, 이러한 로리의 결함, 방황, 실패는 오늘날 우리가 대학생활을 하며 겪는 고충과 똑같다. 대학생활을 하며 우리는, 자신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재능이나 꿈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상하지도 못한 처지에 어느새 놓이게 되고, 일이 상상 그 이상으로 골치 아프게 꼬여버릴 수 있다. 어른이 되가는 것은 그 인생의 씁쓸한 단면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 그 관문을 통과하고 있기에 '망가진' 로리는 깊은 공감을 유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내게는 로리가 칠튼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졸업하며 감동적인 축사를 던진 장면보다, 로리가 엉망이 된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예일에 복학하는 장면이 더욱 인상깊다.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기적같은 상승 곡선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높은 지점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치는 것보다 스스로의 가장 낮은 지점에  잔혹하리만치 솔직해지는 것이 바로 성장임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에 대한 허상의 이미지만을 조장하는 미디어 콘텐츠가 난무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대학생의 현실을 로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예리하게 포착한 길모어 걸스를 시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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