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을 쉽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시간적 여유 덕분에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위키드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뿐 아니라, 웨스트엔드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뮤지컬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메리트였다. 영국 교환학생의 가장 큰 기쁨을 추억할겸, 아직 한국에서 내한 공연이나 라이선스 공연이 열리지는 않았기에 웨스트엔드에서 본다면 더욱 특별한 가치가 있는 뮤지컬 3개를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보겠다.
1. Tina
'A girl's dream. A woman's journey. A queen's legacy.'
뮤지컬 간단 소개: Tina는 웨스트엔드 Aldwych Theatre에서 열리며, 락앤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가수 티나 터너의 삶을 담은 뮤지컬이다.
뮤지컬의 강점:
드라마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티나 터너는 실제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유년 시절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으로 인해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청년기 아이크 터너라는 가수 겸 프로듀서의 눈에 띈 그녀는 데뷔 후 그와 듀오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지만, 터너와의 결혼생활에서 그의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혼을 통해 그의 학대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하지만, 음악적 커리어에서 침체기를 맞이한다. Private Dancer라는 솔로 앨범과 <What's love got to do it>이라는 히트곡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그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모진 풍파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 전기 '영화'는 많지만 전기 '뮤지컬'은 드문 만큼,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진 그녀의 뒷이야기를 뮤지컬 특유의 극적인 연출과 수려한 넘버로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뮤지컬이다.
관극 포인트:
(1) 주연 배우의 가창력: 주연 배우가 티나 터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티나 터너의 환생이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인다. 또한 뮤지컬의 넘버마다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이 (이를테면 노래에 재능을 처음으로 발견한 자의 설렘, 남편이 시키는 대로 노래할 수 밖에 없어서 느끼는 갑갑함, 홀로서기에 성공한 가수로서 묻어나오는 원숙함 같은 것들) 진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이를 해석하는 능력 및 관객에게 울림 있게 전달하는 능력 모두 뛰어나다. 귀가 지루할 틈이 없고 마음이 메마를 틈이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다
(2) 신나는 커튼콜: 실존 가수를 주인공으로 다룬 뮤지컬인 만큼, 커튼콜에서는 밴드와 주연 배우가 등장하여 티나 터너 히트곡 메들리 공연을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공연 뒤에 스크린으로 실제 티나 터너의 공연 실황 영상을 트는 연출을 통해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콘서트의 스탠딩석에 온 것처럼 관객 모두 자리에 일어서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박수를 치는데 이때의 흥겨움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특히 티나 역의 아역 배우와 성인 배우가 함께 부르는 듀엣이 백미이니 (아역 배우를 바라보는 성인 배우의 흐뭇한 표정과 함께) 그 순간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꼭 기록하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2. The Devil Wears Prada
'London's record breaking musical'
뮤지컬 간단 소개: The Devil Wears Prada는 런던 Dominion Theatre에서 열리며, 앤 해서웨이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뮤지컬의 강점:
의상
패션업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자, 원작인 영화가 앤 해세웨이의 세련된 의상으로 인기를 얻은 만큼, 뮤지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의상이 매우 멋지고 화려하다. 데일리룩, 파티룩, 오피스룩까지 다양한 코디 및 스타일을 완벽히 소화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자면 극 내용에 몰입하면서도 동시에 나도 살면서 한 번쯤은 저렇게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영화에서는 앤 해서웨이의 의상에만 시선이 간다면, 이 뮤지컬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의상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 패션, 다시 말해 예쁜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뮤지컬은 후회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이다.
무대
영화의 성공에 패션뿐 아니라 배경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이 뮤지컬도 뉴욕과 파리라는 공간을 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뉴욕이 배경일 때는 뉴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층 건물과 화려한 야경을, 파리가 배경일 때는 대형 에펠탑 모형을 배우들의 연기 뒤편으로 볼 수 있다. 전개상 중요한 장면에 대한 무대 연출도 뛰어나다. 주인공 앤디가 에밀리를 제치고 미란다의 신임을 얻는 파티 장면의 도입부에서는 레드카펫과 계단을 사용한 화려한 무대가 등장하여, 파티를 장악하는 미란다의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미란다가 나이젤을 배신하는 패션쇼 장면에는 관객석을 비추는 대형 거울을 사용한 독특한 무대가 등장하여, 앤디가 미란다의 삶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극적인 순간 주연 배우의 표정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이 선명히 드러나도록 만든다. 뮤지컬 작품의 무대연출 밑 세트 디자인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뮤지컬을 꼭 보기를 추천한다.
관극 포인트:
(1) 비중이 많아진 영화의 조연 배우들: 영화에서 미란다와 앤디 못지않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는 직장에서 앤디의 실질적 멘토가 되어준 나이젤과 에밀리이다. 뮤지컬에서는 나이젤과 에밀리가 단독 솔로 넘버를 부를 정도로 영화보다 비중이 높아졌다. 에밀리의 경우, 영화에서는 한편으로는 앤디를 견제하고, 무시하고, 갈구는 반면, 한편으로는 앤디의 능력을 조금씩 인정하게 되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시니컬하면서도 속으로는 여리고 따스한 면모가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다. 뮤지컬에서는 캐릭터성이 조금 바뀌어서,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극의 긴장을 풀어주는 코믹 캐릭터로 활약한다. 특히 파리행을 간절히 바라거나 미란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순간에는 위키드의 글린다스러운 귀여운 매력도 발휘된다. 나이젤의 경우, 영화에서는 엔디를 도와주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된 반면, 뮤지컬에서는 패션과 일을 향한 자신의 열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포함시켜 나이젤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깊이를 더한다. 이는 나이젤이 미란다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하는 결말의 안타까움을 더욱 배가한다는 효과도 낳는다. 원작의 나이젤과 에밀리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이 뮤지컬을 볼 가치가 있다고 하고 싶다.
(2) 영화팬이라면 감격할 앤디의 무대의상: 영화의 팬이라면 뇌리에 박힌 앤디의 옷차림이 있을 것이다. 미란다로부터 호되게 혼나는 장면에서 앤디가 입은 '페르시안 블루' 니트, 에밀리가 달라진 앤디를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에서 앤디가 입은 '샤넬 부츠', 남자친구 생일과 겹친 파티에서 앤디가 입은 검정색 드레스, 앤디가 런웨이 건물로 출근할 때 입은 흰색 코트같은 상징적인 옷들을 뮤지컬에서 앤디를 연기하는 배우가 그대로 입고 나온다. "저 옷 영화에서 봤는데"하며 내적으로 반가워하는 순간들이 이 뮤지컬을 감상의 소소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3) 가장 트렌디한 포토스팟: 극장이 뮤지컬이 시작하기 전이나 인터미션 때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스팟을 잘 마련해놓았다. 우선 실제 명품 브랜드와 협업하여 제작한 무대 의상을 디스플레이하고 있어서 관객은 뮤지컬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든 의상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또한 영화 포스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색 구두를 거대한 크키로 극장에 설치해놓았기 때문에 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도 좋다. 마지막으로는 런웨이 잡지 표지를 포토부스가 있어서, 부스 안에서 포즈를 취하며 본인이 런웨이 표지모델이 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이렇게 포토스팟이 감각적인 곳은 다른 웨스트엔드 극장에 찾기 드물기 때문에, 기념 사진을 많이 찍으면서 관극의 또다른 재미를 느껴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3. The Great Gatsby
'Jay Gatsby cordially invites you'
뮤지컬 간단 소개: 위대한 개츠비는 런던 Coliseum Theatre에서 열리며,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뮤지컬의 강점:
오리지널 넘버
쉽게 말해 주인공의 심정과 처지를 대변하면서도, 귀에 강렬히 꽂히는 넘버가 정말 많다. 조던이 개츠비의 파티에서 부르는 New Money는 사치와 호화로움의 극치인 개츠비의 파티와 완벽히 어우러지면서도, 압도적인 부와 명예를 갈망하는 당시의 세속적인 사회상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개츠비의 솔로 넘버인 For Her는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개츠비의 신념을 대표하는 노래로서, 위험할 정도로 맹목적인 데이지를 향한 집착과, 그 이면에 있는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와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관객들이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서술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닉 캐러웨이의 넘버로는 Roaring On, The Met, Finale (Roaring On repreise)가 있다. 이는 닉이 개츠비와 데이지의 드라마에 휘말리고, 톰의 부정, 데이지의 비겁함, 개츠비의 몰락을 목도함에 따라, 순진한 제 3의 관찰자에서 당시의 사회상에 염증과 회의를 품은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탁월하게 나타낸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데이지의 심경을 드러내는 넘버가 이 뮤지컬에서 많다는 것이다. For Better or Worse라는 넘버에는 안전한 선택지로서 톰을 택해야 했고,개츠비를 다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이지의 복잡한 속마음이 잘 담겨있으며, A beautiful little fool라는 넘버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애써 외면한 채, 윤리나 사랑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 사회의 관습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택한 데이지의 결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가진 사람이 작곡한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선율뿐 아니라 의미를 충분히 곱씹어볼 가사까지 갖춘 넘버를 이 뮤지컬에서 감상하기를 바란다.
무대 및 퍼포먼스:
'무대가 이렇게 많이 바뀌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심될 정도로, 뮤지컬에서 세트가 자주 바뀌고 그만큼 멋진 세트가 많이 등장한다.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안방, 서재, 파티홀, 수영장), 톰과 데이지의 부유한 저택, 앞에 비해 다소 인간미 있는 닉의 집, 머틀 여동생의 아파트, 머틀의 남편인 조지의 작업장, 플라자 호텔, 개츠비의 장례식장 등 각자의 공간적 개성이 뚜렷한 세트를 구경하는 재미가 큰 작품이다.
뮤지컬이 끝난 후 엑스트라 배우들에게 찬사가 쏟아질 만큼 뮤지컬 전반의 퍼포먼스가 뛰어나다.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개츠비가 2막 시작 부분에 연 파티에서 La Dee Dah with You라는 넘버가 나올 때 배우들이 추는 탭 댄스이다. 개츠비가 여는 광란의 파티에서 New Money라는 넘버가 나올 때, 화룡점정을 찍는 것은 다름 아닌 어마어마한 사치와 향락을 하면서도 이 파티의 주최자인 개츠비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십을 떠는 배우들의 퍼포먼스이다. 개츠비가 Only Tea라는 넘버를 부르며 닉의 집에서 데이지와 만날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는, 개츠비의 하인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닉의 오두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과 장식을 들고 나오는 퍼포먼스를 벌이며 개츠비의 긴장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해준다. 연기, 노래, 퍼포먼스 3박자가 완벽한 작품인 만큼 그 마지막 요소를 간과하지 않은 채 뮤지컬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관극 포인트:
(1) 닉과 조던의 케미: 데이지와 개츠비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닉과 조던의 사랑 이야기도 이 뮤지컬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특히 이 '장난에서 진심이 되는' 클리셰적인 관계에 조던의 적극적인 태도(데이지의 소개로 만났을 때는 싫어하지만, 서서히 이끌리게 되고, 입맞춤도 하고, 나중에 먼저 프러포즈까지 한다)와, 사랑에 아직은 서툰 닉의 귀여운 면모가 매력을 더해준다. 개츠비의 파티에 갈 준비를 하던 중 닉과 조던이 춤을 추며 시작되는 듀엣 넘버 Better hold tight은 사랑에 빠진 둘의 마음을 표현하는 노래로, 이 뮤지컬 넘버의 숨겨진 명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초록색 불빛: 소설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록 불빛이 무대에서 계속 깜빡인다. 뮤지컬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관객이라면 부두의 맨 끝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초록 불빛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극은 닉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조언을 떠올리며, 초록색 불빛을 향해 손을 뻗는 이웃집의 사람을 궁금해하면서 시작되고, 떠날 결심을 한 닉이 초록색 불빛으로 손을 뻗는 개츠비의 환영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으로 끝난다. 초록색 불빛을 믿어야 하는지, 초록색 불빛에 닿으려고 발버둥쳐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의 주제의식이 뮤지컬에도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3) 자동차: 자동차가 원작에서 중요한 소재인 만큼(데이지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톰의 정부 머틀을 치고, 머틀은 이로 인해 죽는다) 뮤지컬 무대에서도 자동차가 등장한다. 주연 배우들은 몇몇 장면에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며, 모든 파국을 초래한 그 장면 역시 무대에서 실제처럼 현실적으로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