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이 내 인생에 가져다 준 것들

순례길에서 귀국하자마자 창업한 썰 풉니다

by 셩PM

5년 전 얘기다.

대단한 이유로 간 게 아니다. 이집트에서 만난 친구들이 계기였다. 1년 넘게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 오래 여행하다 보면 기간도 넉넉하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간다. 그 친구들한테는 그냥 당연한 코스였다. 갔다 왔다, 가고 있다, 곧 간다. 하도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까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힘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갔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 첫날부터 피레네 산맥으로 시작하는 순례길. 해발 1,430m.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오후 3~4시에 도착했다. 체력 준비는 안 했다. 운동을 안 했었다. 올라가며 산에서 몇 번 누웠는지 모르겠다. 누우면 안 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베드버그가 붙는다는 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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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도 문제였다. 등산화를 신어야 하는데, 최소 트레킹화라도 신어야 하는데, 나는 운동화를 신고 갔다.

발은 아프고, 체력은 바닥이고, 준비는 안 돼 있고. 진짜 집에 가고 싶었다.


걷다 보니까 사람들이 하나씩 채워줬다.

준비물을 너무 안 챙겨간 나한테 누군가는 스틱을 줬고, 누군가는 발가락 양말까지 줬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부족한 걸 채워줬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됐다. 걷고, 먹고, 자고, 씻고. 하루에 7시간씩 걸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어디서 자지. 빨래 어떻게 하지. 도착하면 뭐 먹지. 이 생각 말고는 머리에 아무것도 안 남았다.


힘든 것도 계속 하다 보면 익숙해졌다.

그리고 계속하니 잘하게 되었다. 처음엔 죽을 것 같았는데, 며칠 지나니까 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걸었다. 목적지가 있으면 도착하게 된다.

매일 물건을 하나씩 버렸다. 처음엔 안 쓰는 것들을 버렸다. 그러다가 쓰는 것도 버렸다. 도착하는 날에는 입고 있던 우비, 무릎보호대까지 버렸다. 마지막엔 물도 바닥에 부었다. 그 무게조차 싫었다. 하루에 7시간씩 걷다 보면 무거운 게 싫다. 무거운 무게는 물집도 만든다.

사람들이 채워주고, 나는 하나씩 버리고. 그러다 보니 정말 필요한 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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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같이 걷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 인연이 몇 년째 이어지기도 한다. 즐거운 순간도 되게 많았다. 지금 정리하려니까 잘 떠오르지 않는데, 아득한 추억으로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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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가기 전에는 진짜 바쁘게 살았다. 회사 다니고, 사이드 프로젝트 하고, 매일 해커톤 나가고, 치열하게 살았다. 머릿속에 항상 뭔가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본능에만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거다. 한 달 넘게.

심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내 인생에 가져봤다는 것. 그 여행이라는 설렘 안에서 진짜 단순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또 별거 없었다. 서운하고, 섭섭하고. 이제 더 못 걷는다는 게 그랬다. 끝나서 기쁜 게 아니라 끝나서 아쉬운 여정이었다.

모두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인생의 대단한 깨우침을 얻어올 거라 기대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거 없었다.


하지만, 큰 결심을 하게 했다 : 창업

이 길을 계기로 창업을 결심했다. 창업을 결심하게 된 큰 이유가 두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나는 여행을 진짜 많이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그때는 그걸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생은 참 심플하다. 결국 먹고, 자고, 그것만 해결된다면 두려워할 게 별로 없어졌다. 심플하니까 용감해졌다. 비싼 물건, 대단한 것들. 좋지만 결국 본질은 다 똑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잃을 게 무엇인가 싶었고 용기 있게 창업을 결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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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게 얼마 안 된다는 걸,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를 증명해 주는 하나의 스토리가 됐다. 면접에서 힘들었던 경험, 성취했던 경험을 물을 때 순례길 얘기를 많이 했다. 남들이 봤을 때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봐주더라.


5년이 넘게 지났다.

대단한 깨우침 같은 건 없었다. 있었던 건 소소한 것들뿐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걷고, 본능에 충실했던 한 달. 바쁘게 살던 내가 가져본 가장 심플한 시간.


그래도 이 순례길이 알려준 것들이 있다.

나에게, 인생에는 많은 짐이 필요 없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정말 필요한 건 몇개 없다.

힘든 것도 계속 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잘하게 된다.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가면 결국 도착하게 된다. 끝이 없어 보여도 끝이라는건 항상 존재하는것이다.


가장 중요한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그냥 출발하면 된다. 가다보면 또 완성이 된다.

나중에는 가족과 함께 이 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때는 조금 더 좋은 신발을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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