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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Feb 02. 2023

[NZ 07] 히치하이크

기억 혹은 추억(1)

[전 세계 고양이와 집사들을 만나보겠다고 혼자 떠난 세계여행은, <고양이를 여행하다>라는 매거진으로 발행해 하루 1개의 일기와 그림일기로 정리했다. 그 요약본은 <고양이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브런치북으로 발행했고. 마지막 나라인 뉴질랜드는 더 이상 고양이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두 번째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매거진으로 정리 중]




내가 외국에서 히치하이크를 해 본 첫 경험은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초반,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학과 동기와 함께 우리의 첫 번째 배낭 여행지로 대만을 선택했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여행 가이드북 마저 없었던 시절,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 가이드북의 이름은 <세계를 간다>였다.


중앙일보에서 일본판을 가져다 한글로 번역해 출판한 책이었는데 이후로도 몇 년간은 다양한 국가 이름을 달고 출판되면서 여행 서적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정보가 생명인 가이드북이, 최소 2~3년 이상은 지나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탓에 책 속 내용은 업데이트되지 못한 정보들로 가득했고 배낭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세계를 헤맨다>로 불다.



        
            
                
                내가 가진 여행 가이드북의 전부
            
        
    


내가 가진 여행 가이드북의 전부


그렇게 정확한 정보 없이 떠난 낯선 도시에서, 헤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결국 '타이루커 협곡'이란 산새 험한 지역에서 시내로 돌아오기 위해 우린 목숨 건 히치하이크를 해야만 했다. 정말 목숨을 걸었었다지. (이 경험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기회가 되면 다시)




내가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찾았을 때는 극단적으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이 주말을 맞아 남섬 여행을 하고 왔다, 어디 어디 온천을 다녀왔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배가 많이 아팠다.


등교 첫날 레벨 테스트를 통해 이미 고급반에 배정이 되어 'IELTS'라는 시험을 준비 중이던 나와 달리, 이제 겨우 초급반에서 수업을 듣던 그들은 저렇게 공부를 안 할 거면 비싼 돈을 들여 이곳에 왜 왔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 못 가진 자의 삐뚤어진 심술이었다는 걸.


하지만 전 세계에서 온 20대 초중반의 또래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공간에서, 나와 그들의 차이가 '돈'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매일같이 식빵과 참치, 바나나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 도시락을 싸고 음료는 학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밀크티로 해결하던 때였으니.


나는 이를 악물고 IELTS 시험까지 무사히 치른 뒤 내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여행은 가고 싶은데 돈은 없으니, 하루 만원도 안 하는 최소한의 숙박비와 식비 정도만 들고 히치하이크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엄지 손가락 하나 치켜들고 뉴질랜드 최북단 '케이프 레잉가'로 향했다.


히치하이크로 떠난 2박 3일의 여정

1.

외곽으로 나가는 국도 초입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낡은 세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운전자는 내 또래거나 나보다 조금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히피 스타일의 총각이었다.


자신을 화가로 소개한 그는 지금 작업실을 가는 길이라 일단 가는 데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내가 탄 조수석은 예술가의 차는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가 싶게 다 마신 콜라캔들과 과자 봉지, 노트들이 함께 뒹굴고 있어 이것들을 밟아도 되는 건지 심히 고민이 될 정도였다.


1시간 정도 달려 그가 '쪼오기로 빠지면 내 작업실'이라고 말하며 나를 내려준 곳은 와. 글자 그대로 첩첩산중 한 복판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대관령 고갯길의 어디쯤에 날 내려준 셈. 젠장.


2.

산 속이긴 해도 국도가 있는 곳이니 차는 지나가겠지, 했지만 1시간이 넘도록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거니와 있었다 해도 나를 지나치기만 했다. 이러다 날이 어두워지면 히피 총각의 작업실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심각히 고민 중이던 그때 아주아주 매끈한 SUV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나이는 40대쯤, 양복을 말끔하게 빼입은 백인 아저씨였다. 이 아저씨 얘기가 가관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 히치하이크를 하던 일본인 여자 하나가 살해를 당했다는 뉴스를 봤는데, 도로가에서 나를 발견하고 차를 안 세울 수 없었단다. 살해당한 여자가 내 또래였다나.


나야, 그저 웃지요.


내가 가려는 곳을 듣더니 절대로 히치하이크는 안된다며 나를 가장 가까운 도시의 버스 터미널에 내려줬다. 감사하긴 했지만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상태의 나는, 버스를 탈 생각이 없었다. 터미널에서 외곽도로 초입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아저씨 차로 함께 왔던 길을 꾸역꾸역 다시 되짚어 나간 거다.


3.

이 여행을 계획했을 때, 하루 만에 '케이프 레잉가'까지 올라가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기에 첫날의 내 목표는 '파이히아'라는 도시까지 가는 거였다. 그곳까지 다시 몇 번의 친절한 키위(뉴질랜드 사람을 부르는 별명)들 덕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숙박은 도미토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1박에 5천 원이 좀 넘는 돈이었던 거 같다. 그곳에서 나는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리셉션 스태프에게 들으니 케이프 레잉가는 너무 외진 곳이라 투어를 통해서 가는 관광버스가 유일한데 히치하이크를 해서 가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라는 거다.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도를 봐도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날 출발하는 가장 싼 투어를 신청했다.


4.

결론적으로 이 선택은 옳았다. 케이프 레잉가까지 가고 오는 길에 정말로 개인 차량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투어 안에는 뉴질랜드 원시림을 볼 수 있는 국립공원 투어와 샌드비치에서의 모래 서핑, 90마일 비치 달리기 등이 포함되었고 무엇보다 점심 식사도 해결할 수 있었다.


5.

이렇게 소원하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길. 파이히아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첫 번째 히치하이크로 만난 사람은,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우이족 남자였다. 그는 하교하는 아이들을 태우러 학교로 가는 길이라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너 나랑 좀 놀다 가면 안 되니?'라고 묻길래 이게 무슨 미친 개소리인가 싶어 '응? 뭐라고?' 하며 되물으니, 비실비실 웃으며 자기 아랫도리를 가리킨다. 아, 잘못 걸렸구나.


내가 영어가 서툴러서 니 말을 잘 못 알아듣겠어, 하고 모르쇠로 나가니 조수석 글로브박스를 열어 콘X을 보여준다. 개새...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X을 직접 꺼내 들고는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보며,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한국말을 섞어가며 정말 궁금한 듯 말했다. 그러다 창문을 열고는 활짝 웃으며 '와~ 여기 경치 너무 죽이는데 나 사진이나 좀 찍고 갈래. 내려줘.' 물론 영어 문장이 아닌, 단어의 나열로만.


끝까지 나쁜 놈은 아닌지 그는 나를 국도변에 내려줬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고민이 됐다. 다시 시내로 들어가 버스를 타야 하나.


6.

그렇게 길가에 배낭과 함께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웬 픽업트럭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고 트럭 짐칸도 괜찮으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고민은 끝났다.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내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후로 큰 어려움 없이 몇 번 더 차를 얻어 탔고 나는 성공적으로 오클랜드 시내까지 들어왔다. 어쩌다 보니 마지막 차가 나를 내려준 곳은 다니던 학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친구들이나 볼 요량으로 수업이 없음에도 학원에 들어갔더니 나와 가장 친했던 미국인 교사 '미쉘'이 반겨주었다.


내 모험담(!)을 듣던 그녀가 딱 한마디를 했다.


너 미쳤구나.


그랬다. 지금 와 돌이켜봐도 미친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난 그 길에서 나쁜 놈을 만나긴 했어도 생전 처음 만난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들 차량의 조수석을 내어 준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운이 좋은 것도 맞겠지만 그들은 내가 뉴질랜드에서 머물렀던 시간을 비참함보다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게 도와준 많은 이들 중 일부였다.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를 가장 아껴주고 의지가 되었던 미국인 교사, 미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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