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더니든&테카포 호수
이곳저곳 산책하며 시내 구경을 하고 마지막으로 마트에서 고기와 와인 등을 산 뒤 차로 돌아와 보니 벌금 스티커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근처에 있던 주차 요원(한국처럼 주차 안내를 하는 알바가 아니라 스티커를 들고 돌아다닌다)에게 우리가 산 물건을 보여주며 어필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내가, 니네 차대고 마트 빠져나가는 거 다 봤어.
뉴질랜드의 주차 시스템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차를 대고 마트로 바로 들어갔더라면 문제가 없었을까. 오만 인상을 다 쓰고 한 마디 툭 뱉고 가는 그 사람을 다시 불러와 싸울 수도 없었다. 벌금이 꽤나 나왔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다음 날,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뷰 맛집이라고 알려준 동네 카페에서 모닝커피 한 잔을 즐긴 뒤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이번 숙소는 테카포 호수 인근 농장이었는데 별채 하나를 통으로 우리에게 주었다. 침실, 화장실, 거실, 부엌, 테라스 모든 걸 우리만 쓰라니. 어제의 일로 더러워졌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침저녁으로 농장 스태프가 양이며 소에게 밥을 주는 일과를 테라스에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했고 비가 그친 뒤 무지개가 아련하게 걸려있는 마운틴쿡 정상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했다.
우리가 이 동네를 찾은 이유는 테카포와 푸카키 두 호수를 모두 둘러볼 수 있고 무엇보다 마운틴쿡 국립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에도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이 어마무시한 산을, 등산이라면 기겁하는 내가 올라갈 리는 만무하지요.
자연 자체로 어필하며 관광 사업을 벌이는 나라 대부분은, 나처럼 등산은 싫은데 걷는 건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갖 트레킹 루트를 개발해 두었다는 거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산이지만 평지만으로 구성한 '후커밸리 트레킹'은 심지어 땅에 평탄화 작업이 되어 있다.
남섬을 찾은 가장 큰 이유가 이렇게 황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뉴질랜드의 날씨가 얼마나 예측불허인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정해진 시간밖에 없는 관광객에겐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이젠 남섬의 마지막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로 떠나야 하는데 너무나 화창한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우린 그때까지 몰랐다.
문제의 이 날씨 때문에 이번 여행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어마무시한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