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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Feb 07. 2023

[NZ 09] 국제미아가 된 내 짐과 돈

기억 혹은 추억(2)

[전 세계 고양이와 집사들을 만나보겠다고 혼자 떠난 세계여행은, <고양이를 여행하다>라는 매거진으로 발행해 하루 1개의 일기와 그림일기로 정리했다. 그 요약본은 <고양이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브런치북으로 발행했고. 마지막 나라인 뉴질랜드는 더 이상 고양이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두 번째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매거진으로 정리 중]




여행을 많이 다녔으니 여행 중 발생하는 사고 역시 많이 당해보지 않았겠나. 그중에서도 특히 비행기를 내리며 당한, 짐 분실 혹은 파손 사고를 유별날 정도로 많이 당했었다. 도착지 수화물 벨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모든 짐이 나왔는데도 내 짐이 없으면 '와, 씨, 또...' 한마디 하고 자연스레 분실물 접수 데스크로 걸어간다.


칸영화제 출장에서 돌아오던 때는 정말 최악이었다. 중간 기착지였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내 짐이 실리지 않은 것은 물론 미팅 시 받은 시나리오들을 넣어둔 가방 모서리가, 안에 있던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해어진 채 나온 것이다. 내 가방을 바퀴에 달고 활주로를 달렸냐고 접수처 직원에게 되물었다.


문제는 하필 그날, 함께 간 사장님의 짐마저 오지 않았다는 거다.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출장을 다니면서(늘 비즈니스를 타시고) 단 한 번도 이런 사고를 당해보지 않았다는 사장님은, 당연한 듯 분실물 데스크로 걸어가 신고 접수를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하셨다.


수화물 분실이 내 탓은 아니었지만 이미 나는 입사 후 일주일 만에 떠났던 첫 밀라노 출장에서 비행기를 놓쳤던 사고를 쳤던 터라 사장님 입장에선 이 황당한 이벤트가 '너 때문에??'라고 생각해도 난 할 말이 없었다. 재수 없음을 너무 강력하게 가진 사람 옆에 있으면 전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쩌다 비행기를 놓쳤는가.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행기 출발이 많이 지연된 데다 동시에 출장을 가는 국내 수입업자들로 인해 탑승 게이트 앞은 앉을 의자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옆 게이트에 앉아 책을 읽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공항 안내방송을 듣지 못했다. 너무 심하게 늦는데 싶어 뒤를 돌아보니 게이트 앞은 이미 텅텅 비어있었고 비행기는 탑승구 연결 통로와 막 분리가 되는 중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지만, 내가 누구인지 확인한 그라운드 스태프는 왜 이제야 왔냐며 소리를 질렀다. 비행기가 지연 출발을 한 데다 나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고 결국 나타나지 않은 나 때문에 내 짐을 다시 빼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절대로 비행기를 세울 순 없다 했다.


그렇게 나는 내 눈앞에서 비행기가(사장님이) 떠나는 걸 봐야만 했고 생전 처음 여권의 출국 도장 위로 'VOID' 도장이 다시 찍히는 이른바, '역사(거꾸로 공항을 나가는 걸 일컫는 말)'라는 걸 당했다. 비즈니스석으로 여행하시는 사장님은 내가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늘 위에서 아시게 되었다.


물론 다음 날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사장님을 따라잡긴 했으나 이 날의 사건으로 나는, 함께 출장을 갔던 국내 수입사 사장님들 사이에서 '00 회사의 신입사원, 44K'로 불렸다. 안 나타나는 나를 찾느라 기내방송을 엄청나게 해댄 탓이었다.


지금에야 웃는다...




내 수화물 분실 사고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뉴질랜드다.


1년여를 지내야 해서 여름옷과 겨울옷을 분리해 슈트케이스 2개를 만들었는데 겨울 옷이 든 짐이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라졌던 나의 짐은, 나도 못 가본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했던 때가 8월이라 구멍이 숭숭 뚫린 시원한 망사 옷과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우리와 정반대의 계절이었던 뉴질랜드에 도착해서는 공항에서 웃옷을 꺼내 입으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문제는 잠바며 가디건이며 뭔가 걸칠만한 것들은 모조리 분실된 짐 속에 들어있었기에 나는 한 겨울의 오클랜드에서 망사 옷과 반바지를 입고 공항을 나서야 했다.


결국 에어 뉴질랜드는 일주일 만에 내 짐을 찾아 주었고 위자료(?)로 십만 원 정도를 내게 주었지만 난 이미 운동복 바지와 가디건을 사느라 그 돈을 다 쓴 뒤였다.


뉴질랜드에서는 내 돈도 사라졌었다.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은행이 내 돈을 잃어버렸다. 정확히는 한국에 있는 은행원의 실수로 나는 약 3개월이 넘도록 돈의 행방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개인이 외국으로 돈을 보내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았었고 우리 고향에는 외환은행도 없을 때였다. 알바를 할 생각으로 큰돈을 들고 오지도 않았고 부모님께서 한 달에 한번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주기로 하셨었는데 그 돈을 송금하던 은행원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계좌를 만든 뉴질랜드 은행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매일 체크를 했었다. 나를 담당했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외국으로의 송금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에게 오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환(율)차익'으로 장사를 하는 은행은, 예를 들면 송금을 할 때 서울->오클랜드로 바로 돈을 보내는 게 아니라 서울->홍콩->뉴욕->런던->오클랜드 식으로 돈을 여기저기로 보내면서 그 사이에 환율로 발생하는 이익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문제는, 종착지인 오클랜드에서는 돈의 행방을 추적할 수가 없고 반드시 출발지인 한국에서 찾아주어야 하는 건데 그게 결국 3개월이 걸린 거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처음엔 알 수가 없어 부모님께 더 이상 돈을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알바를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나는 정말 하루하루 피를 말리고 있었다.


이렇게 남들은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고를 숱하게 당하며 여행을 다녔지만 그날, 테카포 호수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하던 길에 나와 H는 '당분간 우리 인생에 여행은 없다'라고 선언해 버렸으니...


따지고 보면, 내 슈트케이스가 나보다 더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네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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