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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Feb 15. 2023

[NZ 15] 그가 있었다 (2)

기억 혹은 추억(5)

[전 세계 고양이와 집사들을 만나보겠다고 혼자 떠난 세계여행은, <고양이를 여행하다>라는 매거진으로 발행해 하루 1개의 일기와 그림일기로 정리했다. 그 요약본은 <고양이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브런치북으로 발행했고. 마지막 나라인 뉴질랜드는 더 이상 고양이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두 번째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매거진으로 정리 중]




뭔가를 의식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더 신경이 쓰이는 법 아니던가.


카메라 무시하고 그냥 이 동네에 놀러왔다 생각하고 다니라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렌즈를 쳐다보며 '포즈'란 걸 잡지는 않아도 되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도 익숙해졌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고 내 대답은 어느새 점점 길어졌다. 해 질 무렵 촬영을 접은 우리는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날 오후 시간 내내, 수업 시간에는 들을 수 없었던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풀어놓고 났더니 우린 환상의 수다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다시 페리를 타고 오클랜드로 돌아왔음에도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우리는 커피를 사서 어둠이 내린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동이 트고 있었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잠깐 잠을 잔 뒤, 우린 어제의 그 공원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와인 한병을 들고. 술의 힘을 빌어 그가 고백이란 걸 했다. 니가 좋은데 우린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니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를 여태 만나본 적도 없고 서양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동양적 사고방식을 가진데다 감수성은 또 어찌나 풍부한지.


우리는 또 밤을 꼴딱 새웠고 다음 날 아침, 기숙사 앞에서 나를 들여보내며 그는 울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실감을 못했었나 보다. 그러다 그의 출국 시간이 되었을 무렵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학교를 결석했다. 내가 걱정이 된 일본 친구 T가 기숙사까지 찾아와, 나를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자신의 홈스테이 집으로 데려갔다. 마침 그녀가 머무는 집이 사라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났던 이틀 동안 잠을 거의 못잔 탓에 사라가 해주는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다 새벽에 눈을 뜬 나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따뜻한 차와 함께 나타난 사라가 나를 위로했다.


인생은 길어.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꼭 다시 만날거고 어떻게 될른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 그만 울어.  


그랬다. 스위스로 돌아가는 길, 그가 싱가포르 공항에서 나에게 부친 엽서가 도착하던 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쩌면 '연애'란 걸 할 수도 있겠다는 걸.


몇 달 동안 일주일에 3~4번씩 전화를 걸어오던 그가 어느 날 폭탄같은 선물을 안겼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위스로 오지 않겠느냐고. 왕복 비행기표는 이미 구입했다고.


어차피 학교도 꽤 긴 시간 휴가에 들어가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뉴질랜드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스위스까지 지구 반바퀴를 돌아 그를 다시 만났다. 어학연수를 와서 이런 식의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사라의 말처럼 인생은 정말 예측불허다.


그의 부모님은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의대생이라는 하나 있는 여동생은 지금 코스타리카로 거북이를 살리는 환경운동에 참가하느라 집에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그녀의 방에서 마음 편히 머물 수 있었다.


우리의 8년 연애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에 돌아 온 나는 목표로 했던 외국계 회사에 떨어져 버렸고 취업을 하고 싶은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왜 그 먼 곳까지 가서 돈과 시간을 썼는가 싶어 내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의욕이 없었다는 건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던 나는, 일년에 두 번 그가 방학을 하는 때에 맞춰 늘 스위스를 방문했다. 한번 가면 한달 정도 머물렀으니 제대로 된 회사 생활을 하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오래되자 나는 내 커리어를 쌓는 뭔가가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이말인즉슨 내가 취업을 하는 순간 이 연애는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회사에서 기껏 일주일 휴가를 받는다해도 가고 오는 시간과 시차를 감안하면 우리는 겨우 3~4일 정도 볼 수 있겠지. 그것도 1년에 한 번.


아무리 이틀에 한번 전화 통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는다 해도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누구와의 관계에 얽매어 끌려가는 삶이 아닌, 내가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싶었다.


나는 이 연애를 끝내기로 했다.  


이별은 어렵지 않았다. 시차때문에 새벽마다 받아야 했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이제 앞뒤 재지 않고 마음 편히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만나질 못했었으니 헤어졌다고 해서 내 일상이 달라질 게 크게 없었다.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연애를 끝낸지 그토록 오래 되었지만 우린 지금도 친구로 지낸다는 거다. 페이스북을 통해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엿보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산다.


나랑 처음 캠핑을 갔을 때는 텐트 하나도 제대로 못치던 그가 지금은 남유럽을 돌아다니며 카약도 타고 캠핑도 즐긴다. 텐트 사진을 올려놓고 나에게 옛날의 자기가 아니라며 자랑을, 자랑을...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던 부모님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며 이혼을 하셨고 의대생이던 여동생은 지금은 의젓한 소아과 의사가 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에 사는 그의 이모는 우리가 헤어진 걸 알고서도 가끔 안부 엽서를 보내주기도 하셨다.


두번째로 뉴질랜드를 찾으며 말할 수 없이 많은 추억과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의 지분이 가장 크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이곳에서 보낸 시간 자체는 얼마되지 않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뉴질랜드를 떠올리면 언제나 그가 있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내 인생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지금까지도 말할 수 있게 해준 그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감기로 누워있던 M을 대신해 그의 아버지가 근교 투어를 시켜주었다. 식구들도 잘 안 태워준다는 애마 포르쉐를 가지고


야외활동을 그닥 즐기지 않는 나를 굳이 끌고 나와서는 텐트와 몇 시간 씨름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이때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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