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므스므 Feb 23. 2023

[D+100] 이제, 끝

여행을 마치며

여행이 끝났다. 정산을 좀 해 보자.


전 세계 고양이와 고양이 집사들을 만나보겠다고 떠났던 100일간의 세계 여행. 


거창하고 야심차기 이를 데 없던 이 계획을, 이제와 돌아보니 뭔가 많이 어설프다.


일단 '세계 여행'이란 단어를 붙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구를 글자 그대로 한 바퀴 돈 것은 맞으나 남미는 근처에도 안 갔고 아시아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봤으며 영국도 호주도 빠졌다. 


물론 세계 여행이라고 해서 어디를 반드시 가야 한다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대도시 위주로 동선을 짰더니 세계 여행이라기보다는 '도시 탐방 여행'쯤 된 것 같다. 내가 평소에 가고 싶던 도시보다는, 좀 더 공부를 해 보고 그 나라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도시로 선택할걸. 


100일이라는 시간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뭐든 딱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라 100이라는 숫자에 집착한 결과다. 


대한항공 세계일주 티켓의 유효기간은 1년이니, 100일이 아니라 10개월쯤 다녔다면 어땠을까. 저금해 둔 돈이라든지, 임시집사님의 스케줄이라든지, 저질 체력이라든지 결국 그리 하고 싶어도 못했을 이유는 백만가지지만 그래도 평생에 한번 있을 이벤트였는데 좀 더 고민해 볼 걸.


사실 뒤를 돌아보게 된 지금에야 말할 수 있는 가장 어이없는 한 가지는 바로 고양이와 고양이 집사들을 만나겠다는 이 여행의 동기 자체다.


숙소를 정할 때 고양이가 있는, 예산에 맞는 집으로만(뉴질랜드 제외) 고르다 보니 선택지가 많이 없었고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운타운을 벗어난 지역을 골라야 했다. 결국 이 선택으로 인해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원활하지 않을 뿐 아예 없는 건 아니라 핑계일 수도 있지만, 귀찮음이 몸의 8할을 차지하는 인간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날이 많다 보니 (물론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에 대한 고찰은, 논문 한 편 쓸 정도로 많이 했지만) 이렇게 숙소에만 있을 거면 난 이 여행을 왜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종종 있었다.


고양이와 고양이 집사를 만나보는 건 내가 숙소에 도착한 순간 이미 충족되었고 이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한계(외출냥이들이 많았고 호스트도 바쁘다)가 있다 보니 사실 나는 이것과 별개로 내 여행을 했어야 했다. 너무 준비를 하지 않았던 거다.


귀찮다는 이유로 일생에 한 번밖에 없을 이 기회를 무료함으로 채웠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나의 이 선택으로 인해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인연들을 만났다.


암에 걸린 40년 절친을 버리고 여행이나 떠난 내가 너무 미웠던 날, 자신을 갉아먹지 말라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라고 말해 준 포르투의 플라우시나를.


동생의 5번째 기일을 보내던 날, 그저 묵묵히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 준 케이프타운의 야니를.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밤, 정원에 나와 생각에 빠져있던 내 옆으로 조용히 등불을 놓아주고 가던 암스테르담의 까롤린을.


이역만리 아프리카에서 평소에도 받기 힘든 거나한 한정식을 차려 주시고 마지막 포옹에 진심이 가득가득 전달되던 케이프타운의 민박집 아주머니를.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로 당당하게 노년의 삶을 살면서 주변인들(혹은 개)에게 오지라퍼를 자처하던 시애틀의 크리스틴을.


죽을 때까지 다시 볼 확률이 거의 없을 나를 위해, 자신이 가진 걸 다 퍼주고 더 퍼주고 싶어 안달이 났던 라스베이거스의 코라를.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펴주고 이 여행을 10일이든 100일이든 가능하게 만들어 준 가장 고마운 사람, 임시 집사님을.


잊지 못한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과연 좋은 사람이 되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13살에 접어드는 내 고양이들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우리 셋, 함께 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 거야. 

후회 같은 걸로 나를 갉아먹진 않을 테야.


그러니 나의 이 여행도, 그때의 나에겐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돌고 돌아 제자리에 와보니 내가 이 여행에서 가지고 돌아온 건, 내 삶을 바라보는 '긍정의 힘'이었네. 


그때도, 지금의 나에게도 가장 절실한 무엇.



드디어 마지막 착륙. 와, 저 노을 뭔가


매거진의 이전글 [D+88] 인터미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