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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소금 Sep 16. 2022

03. 3인칭 관찰자 시점



대학병원에 처음으로 다녀온 날. 암 진단받은 다음날 밤도 자려고 누웠더니 낮에 잘 참았던 눈물이 또 터졌다. 검사도 받아야 하고, 수술도 받아야 하고, 그 후에 무시무시한 항암치료도 기다리고 있다는 게 현실로 와닿아서 인지 어쩐지 불안하고 슬퍼졌다. 자려고 누웠다가 침대 밑바닥에 제대로 앉았다. 티슈 한 통을 다 쓰도록 눈물 닦고 코를 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야?' 

그래. 오늘 아침에 그 찐빵 같은 얼굴 보고서 그렇게 화가 났는데 또 울면 내일 아침은 어쩔 건데. 도대체 왜 우는 건지 하나씩 따져보자. 



- 야. 왜 울어. 뭐가 무서운데. 수술이 무서워?

- 응 좀 무서워. 암 수술이잖아.

- 근데 네가 지금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져? 

- 아니

- 그럼 됐고. 다음



- 항암치료도 좀 무서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머리카락도 다 빠진다잖아. 

  아픈 것도 서러운데 대머리가 된다니 너무 우울하잖아. 나는 여잔데!! 

- 영원히 그런 거 아니잖아. 다시 날 거잖아. 그리고 가발 쓸 거잖아. 요즘 예쁜 가발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이참에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가발로 도전해보는 거야. 나름 재밌을지도 모른다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런 말도 있잖아. 그 상황을 이용해서 새로운 걸 해보는 거야. 

- 아 그런가? 예쁜 가발...

- 그럼 됐고. 다음



-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암에 걸렸잖아. 억울해. 

- 결혼 안 한 게 왜 억울해? 암 치료하고서 나중에 하면 되잖아. 

  암환자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못하는 게 아니니까 억울할 필요 없지.

- 아 그런가? 나중에 하면 되는 건가? 근데 암환자를 만날 남자가 있나?..

- 이 와중에 그게 중요해? 됐고. 다음



- 아직 세상에 남겨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 이대로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다못해 자식이라도 남기던가. 자식 같은 작품이라도 남기던가. 

  아니면 이름이라도 남기던가. 이대로면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 아니야? 

- 아직 시간 있어. 치료받고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작업을 해. 

  그리고 세상에 남길만한 작품을 만들어. 그럼 되잖아.

- 내가 할 수 있을까? 

- 지금 니 기분을 생각해봐.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거 같지? 그 기분으로 뭐라도 하는 거야. 

  뭐라도 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자 그럼 됐고. 다음.



- 그런데 나 혹시라도 진짜 4기라고 하면 어떡해? 시한부라고 하면 어떡해?

- 야. 아직 검사 결과 나오려면 한참 멀었어. 수술하고서도 2주 후에나 정확한 기수가 나온다잖아. 

  그럼 한 달 뒤에나 몇 기인 지 나온다는 건데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 있어?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 시한부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지금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시간이 없다는 데 매일 울면서 자고, 아침엔 부은 얼굴에 짜증 내면서 그렇게 살 거야?  

  나 같으면 하루라도 더 멀쩡한 모습으로 즐겁게 살 거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 거야. 

  지금만큼 인생에서 시간이 아까웠던 적이 있어? 나중에 인생의 마지막 날에 후회할만한 일을 하지 마.

- 그러네. 한 달 뒤에 무슨 이야기를 듣던 지금은 내가 울고 있을 이유가 없네. 




정말 하나씩 이성적으로 따져보니 지금 내가 울고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 아까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지 잘 계획해야지. 그렇게 결론짓고 나니 어느새 눈물이 멈췄다. 고요한 새벽 시간. 바닥에 널려있던 티슈 뭉치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은 잠들 수 있었다. 










인생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되는 그런 날. 나 자신을 조금 멀리 두어야 한다.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변환하는 거랄까. 가끔 위기의 순간에 뜬금없이 찾아와 주는 3인칭 자아가 고맙다. (나는 나의 이 3인칭 자아를 내 인생의 옵서버 observer라 부른다.) 덕분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 밤 나와의 대화 이후로 한동안 눈물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건져내어 줄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격하게 반항할수록 코와 입에 물이 들어가고, 숨도 막히고, 몸이 자꾸 물속으로 빠질 뿐이다. 감정을 바다로 만드는 것도, 호수로 만드는 것도 모두 내가 하는 일이다. 자신의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바다가 아니라 잔잔하고 수심이 얕은 호수였음을, 내가 발로 딛고 서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는 그런 호수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잠잠히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은 멀리, 조금은 냉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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