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소금 Sep 16. 2022

02. 쿨함은 가족력인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마냥 슬펐던 감정 이외에 걱정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엄마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는 것이었다. 계속 훌쩍거리고 있는 내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오빠에게 부탁했다. 모든 상황을 대신 전달해달라고. 그리고 아마도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 엄마는 오빠의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걱정과 달리 차분한 분위기로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 엄마와 마주 앉아 그제야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는 요즘 의료기술도 좋고, 빨리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다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차마 병원에서 3기 일지 4기 일지 모른다고 했다는 말은 못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하면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최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 모녀는 그날 각자의 방으로 일찍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긴 밤을 그날 보냈다. 침대에 누웠는데 자꾸 눈물이 흘러 베개가 젖었고, 축축한 베개를 계속 베고 있자니 기분마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앉았다 누웠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정말 화가 났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을 보자니 그냥 화가 났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밤새 울었던 내 얼굴은 아침이 되자 정말 찐빵처럼 부풀었고, 눈은 겨우 뜨는 상태에다 눈가의 붉은 기는 화장을 해도 덮이지 않았다. 이 기분에, 이 상황에, 이 얼굴로 출근을 해야 하는 거구나. 현실은 참 야박했다. 

출근 후 대학병원에 가야 해서 곧 퇴근하겠지만, 내게 너무도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맞닥뜨린 현실의 냉정함에 조금은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 냉정함 덕분인지 그날 낮 동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학병원에 도착해 교수님을 만났고, 수술 날짜를 바로 잡았다. 추석 연휴가 사이에 끼어있어 열흘 후쯤 수술이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수술 날짜를 가까운 날로 바로 잡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했다. 보통은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지나고 생각해보니 운이 좋았던 일들이 꽤나 많았다. 그 당시에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지나갔던 많은 일들이 너무도 큰 감사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수술 전 연휴 전후로 나는 추가 검사들을 받았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께도 연락해 상황을 알리고, 연휴지만 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도 반응이 담담하셨다. 부모님도, 오빠도 다들 너무 쿨했다. 울고 짜는 것보다야 백배 낫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깊숙한 어딘가에 섭섭함 한 조각 정도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쿨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나도 사람인 걸. 












 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처음 대학병원에 내원할 때에 혼자 오는 경우가 잘 없다는 걸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접수를 하는 것도, 예약을 하는 것도, 선생님께 설명을 듣는 것도 모두 나는 다 혼자 했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그런데 암 센터에 들어서니 혼자인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다들 가족과 함께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수속 밟는 것은 대체로 가족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다시 조금은 서글픈 마음이 비집고 올라오려고 했다. 나는 왜 여기에 혼자 왔을까.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아프신 부모님을 모시고 온 자녀들, 그리고 아픈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님들이었다. 

'그래. 지금은 누가 봐도 나는 보호자 같은데.. 사지 멀쩡한 내가 굳이 혼자 못 올 이유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쯤이면 쿨한 가족력도 나쁘지 않다. 


 우리 가족은 제삼자가 보기에 어쩌면 정 없는 사람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웃음 많고, 긍정적이며 한없이 밝은 캐릭터들인데 의외의 일 앞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특이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잠시 서운함을 느껴도 금세 풀려 뒤끝 없는 사람들. 

이후 나의 8개월 동안의 항암치료 기간 동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병문안을 오지 않으셨지만 나는 그것이 애정 없음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나는 가끔 서운할지언정 그걸 내가 오해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어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서른둘의 가을, 암이 찾아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