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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소금 Sep 20. 2022

07. 세 번째 산을 준비합니다


 수술 상처가 덧났던 트러블로 인해 항암 스케줄이 몇 주씩 밀려 다시 조정되었다. 9월 마지막 주에 암 환자가 되었고, 10월 초에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 치료는 다음 해 1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 무시무시한 항암치료가 남았다. 세 개의 산 중에 가장 큰 세 번째 산이다. 항암이 다가오던 시기에 나는 여러 가지 준비를 시작했다.


- 가발

 방사선 치료 기간에 가발에 대해 많이 알아보았다. '암환자 가발'이라는 키워드를 치면 검색 결과 대부분 중년 어머니들의 헤어스타일 가발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오늘 다시 검색해보니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만큼 젊은 암환자들이 많아졌다는 증거일까. 

 많은 가발 업체들이 암환자에게는 인모 가발을 권하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최소 몇십 만원대. 긴 머리는 더욱 비쌌다. 내 계획은 머리를 삭발하는 김에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도전해보는 것이었는데 이대로면 하나만 사기에도 부담스러운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럼 꼭 인모 가발이어야 할까? 왜 유독 암환자에게 인모 가발을 권하는 건지 그 이유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아보니 암환자들은 장시간 가발을 써야 하니 최대한 자극이 적고 관리가 편한 인모가 적합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런 이유라면 굳이 인모를 사지 않아도 되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는 검색어를 바꿨다. '패션 가발'로. 예쁜 헤어스타일이 잔뜩 보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발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최대한 이전의 내 헤어스타일과 비슷한(원래 항상 긴 생머리였는데 방사선 치료기간에 중단발로 잘랐다.) 짙은 초콜릿색 머리의 중단발를 구매 했다. 인조모 가발도 원사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그중에서 고급을 고르면 가발 티가 덜 나는 것 같다. 가격도 십 만원대 초반이어서 나쁘지 않았다.


 일단 기본 아이템을 구비했으니 조금 색다른 것도 하나씩 추가할 생각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가발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살펴보았다. 어느 날 베프를 만나서 그동안 봐 둔 가발 사진들을 보여줬더니 친구가 말했다.

"너는 참... 지금 되게 신나 보인다."

항암을 앞두고 걱정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신나 보였다고 한다. 항암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생활 안에서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니까 나는 가발에 집중하고 있는 거라고 했더니, 베프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지켜보면서도 신기하다고 했다. 이게 신기할만한 일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인가 보다 생각한다. 









- 치과와 미용실 

 가발 이외에도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당시 치아 교정 중이었는데 치과에 가서 선생님께 상담했더니 항암 치료 중에는 면역력이 떨어지니 교정기를 하고 있는 것이 입 안에 상처를 낼 수 있어서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교정 막바지여서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완료되었으니 그쯤에서 마무리하는 걸 권하셨다. 그래서 계획보다 조금 일찍 교정기도 제거하고, 늘 긴 생머리 치렁치렁했던 헤어스타일도 단발로 정리했다. 미용실에서 단발로 자르던 날에 20센티가 넘는 길이를 자른다니까 미용실에서 재차 괜찮겠냐고 물었다. 차마 항암치료를 받아야 해서 자른다는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아 괜찮다고 했는데 미용사님이 눈치를 챈 건지 

"긴 기장은 고무줄로 묶어 한 번에 자르는데 이거 드릴까요?" 물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물어보니 갖고 싶어 져서 그날 머리카락 묶음을 받아왔다. 그리고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 


- 여권 사진

그때까지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여권이 없었는데, 그렇게 산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다. 내 20대는 여러 차례의 입시, 대학공부, 갖은 병치레. 딱 이 3가지로 거의 모든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별 게 없었다. 연애도 조금은 끼어있지만 저 3가지의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이라 별책부록 정도 되려나. 


 30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암환자가 되어 버렸으니 정말 그동안 한 게 없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가든 못 가든 여권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동안 사진 찍기 어려운 상태일 테니 항암 치료 전에 사진을 찍어두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연말의 어느 겨울날 모교 앞에 있는 사진관을 찾았다. 그날은 무슨 용기였는지 사진사 아저씨께 나는 곧 항암치료를 받아야 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전에 미리 찍어두는 사진이다, 그러니 더 예쁘게 잘 찍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웃으며 찍는 프로필 사진도 추가로 찍어주겠다고 하시며, 인화는 하지 않았지만 파일로 주셨다. 나중에 파일을 확인했는데 웃는 사진에만 눈물이 맺힌 게 보였다. 그때 표정은 웃고 있는데 사실 속으로는 왜인지 모르지만 이 사진이 내 마지막 증명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표정은 바꿀 수 있었지만 눈빛은 속이지 못했나 보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그날의 감정이 떠올라 살짝 아리다. 나만 아는 내 속마음 이야기. 






- 암 요양 병원 찾기 

 항암 준비 중 제일 힘들었던 건 내가 지낼 암 요양병원을 찾는 일이었다. 내가 치료받던 대학 병원은 병실이 너무 부족해 상태가 양호한 암 환자는 당일 입원으로 들어가 항암제를 맞고 저녁에 퇴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병원에서는 나를 전혀 돌봐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집에 있거나 다른 병원으로 가야겠다.

 당시 엄마는 딸이 아프다는 사실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계셨고, 티를 안 내려하셨지만 다 느껴졌다. 그런데 항암 치료 기간에 집에서 지내면 엄마에게 심리적으로 더 부담이 될 것 같아 조용히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암 요양병원을 검색해 좋아 보이는 곳들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시설이 좋은 곳들은 기본 입원비가 한 달에 2백만 원이 넘었고, 치료를 받게 되면 다 개별적으로 추가되어 병원비가 평균 5백 이상은 나오는 그런 곳이 대부분이었다. 시설이 좋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전화를 거는 곳마다 나에게 보호자냐고 물었다. 내가 입원할 환자라고 했더니 목소리가 너무 어려 보이는데 자신의 병원은 노인환자가 대부분이라 그곳에서는 적응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생각보다 요양 병원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성북구에 있는 작은 병원을 찾았다. 암 치료 중인 환자 전용 병원이고, 1일 입원비가 5만 원대로 조건이 나쁘지 않아 방문을 해보았다. 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유튜브 같은 곳에서 나오는 단식원 같은 분위기였는데, 가정집 같은 방에 4-5명의 암 환자가 침대 없이 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기 계신 분들은 찜질방 옷과 비슷한 단체복을 입고 다들 민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생활하고 계셨다. 대부분 지방에 사는 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치료를 위해 올라와서 생활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 연령대도 대부분 5-60대로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곧 내게 닥칠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지내야 한다는 게 조금 서글퍼졌다. 


 며칠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곳은 못 갈 것 같았다. 차라리 병실이 나을 것 같아 강남에서 병원을 더 찾아보다 예전에 살던 동네의 D 병원이 기억났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가 원무 과장님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 같은 경우는 치료받는 대학 병원도 서울, 집도 서울이어서 거리로 인한 입원이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의료보험 처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험으로 전액 결제하기로 하고, 치료는 대학병원에서 받기 때문에 그 병원에서는 다른 치료나 처방 없이 입원 생활만 하고, 피검사받으러 나가는 것도 혼자서 외출하는 걸로 협의했다. 이렇게 항암 치료 준비가 끝났다. 


 준비 와중에 서글픈 마음이 가끔씩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상황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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