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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 그림 읽는 남자 Sep 26. 2023

가을의 달이 맑으니 세상이 청아하다(秋澄萬景清).

옛 그림 산책. 9




1. 팔월의 큰 달, 한가위.

 

 한가위는 설 다음으로 큰 명절로 음력 8월의 한가운데 또는 가을의 가운데를 의미하며 ‘가위’, ‘한’은 ‘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문으론 추석(秋夕)과 중추절(仲秋節)이라 하는데, '가위'와 같은 뜻으로 중추(仲秋節)라 한다. 한가위 때는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달맞이 풍속이 있듯이 대보름만큼이나 달빛이 깊다. 그래서 이때 보는 달을 중추지월(中秋之月)이라 한다. 곧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오니 옛 문인들이 남긴 만월(滿月)을 망월(望月) 해보려 한다.




2. 고사의 달빛(高士望月).

2_1.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1611)는 성종의 8남이자 서자(庶子) 익양군(益陽君) 이회(李褱)의 증손으로 왕실의 종친이자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서화가이다. 이경윤은 영모(翎毛), 화조화(花鳥畵), 산수 등 다양한 분야를 잘 그렸지만, 특히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물 대다수가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이다.

이경윤, <월하탄금도>, 31x25cm, 견본수묵, 고려대학교박물관

 이경윤이 활동한 시기는 안견파(安堅派)에서 절파화풍(浙派畵風)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시기이다. 더불어, 왕실과 문인(文人)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은일(隱逸)한 그림의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가 유행한다. 이시기의 조선의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는 고사(故事)의 인물이나 일인고사(逸人高士)와 같은 인물을 소경(小景) 산수형식이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를 보면 당대 문인들이 추구한 은일성(隱逸性)이 보여준다. 고사(高士)는 달빛을 벗으로 삼아 거문고를 타고 있다. 달은 농담의 음영을 주어 은은함이 극에 달하고 있으며, 앞 바위와 뒤 바위는 부벽준(斧劈皴)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웅장함을 잡아준다. 


 흑백의 명암으로 처리한 부벽준(斧劈皴)은 절파(浙派)의 양식을 적절히 활용된 것이다. 그렇기에 거문고를 고사(高士)를 집중시켜주면서 자연스레 시선을 달로 향하게 한다. 먹의 농담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나타내었다. 


 작은 화면의 산수인물화임에도 불구하고 작게 보이지 않는 것은 주제의 달과 거문고의 고사(高士)를 집중하여 불필요한 요소는 배제했기 때문이다. 부벽준(斧劈皴)의 농담(農談) 처리 이외에는 배경을 넣지 않았으며 거문고를 타는 고사(高士)와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 차를 내리는 행자(行者) 그리고 벗과 다름없는 달만 그림에 들어가 있다. 보는 행위로서 선을 이루는 화선(畫禪)의 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2. 고사의 달빛(高士望月).

2_2. 윤두서의 의암관월도(倚巖觀月圖).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이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안견파(安堅派)와 절파(浙派)의 화풍을 구사한 화가라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문인이자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다. 윤두서의 경우 절파의 양식과 더불어 당시 도입된 남종화풍(南宗文人畵)를 구사하였다. 절파의 양식도 구사하였지만, <고씨화보>, <당시화보>와 같은 다양한 화보를 통해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남기는 등 남종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윤두서, <의암관월도>, 21x25cm, 견본수묵, 간송미술관

 윤두서가 그린 <의암관월도(倚巖觀月圖)>를 보면 이경윤 못지않은 문인의 아취(雅趣)와 은일함이 담겨있다. 화면 왼쪽 하단을 보면 고사(高士)가 바위를 개고 하늘을 보고 있다. 고사가 보고 있는 하늘의 방향을 보면 홍운탁월(烘雲托月)로 그려 놓은 달이 보인다.


  바위와 고사(高士) 그리고 달 이외의 공간은 흐릿하게 선염(渲染) 하여 고사(高士)가 바라보는 달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있는 것과 같은 공간감을 주고 있다. 고사(高士)가 기댄 바위는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으로 입체감을 나타내었으나 고사(高士)의 의관은 선으로만 묘사하는 등 바위의 무게감과 선비의 고아함이 대비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강한 붓질의 부벽준(斧劈皴)으로 바위의 공간을 형성하였다면, 윤두서는 윤곽선을 쓰지 않는 몰골법(沒骨法)의 농담만으로 바위의 형태를 나타내었다. 절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흑백의 대조를 농담의 선염(渲染)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기법은 남종화풍(南宗畫風)을 구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경윤의 경우 은일(隱逸)하면서 극적인 감정이 느껴지지만, 윤두서의 경우 적요(寂寥)한 은일(隱逸)함만 가득하다. 당시 당쟁의 심화 속에서 남인(南人)으로서 살아가는 어려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투영(透映)하였기에 아련함이 더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3. 달빛 아래의 즐거움(月下喜樂).

3_1. 김홍도의 월하고문도(月下敲門圖).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보름달을 꼽으라면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를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만큼이나 가을의 달빛이 은은한 그림이 있다. 바로 <월하고문도(月下敲門圖)>이다. 

김홍도, <월하고문도>, 27x23cm, 지본담채, 간송미술관

 <월하고문도(月下敲門圖)>를 보면 보름달이 오른편 상단 나무에 걸려있는 듯 떠 있다. 나무는 굵게 선을 주어 고목(古木)처럼 느껴지며 나뭇가지에 잎이 있을 듯 말 듯 넣어 가을의 적막함으로 다가온다. 보름달은 연청(軟靑)의 담채로 맑게 홍운탁월(烘雲托月) 하였다. 


 나뭇잎 몇 가닥 달린 게 없는 적막한 고목(古木)에 맑은 청색의 은은한 달빛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들쳐주고 있다. 고요함과 은은함이 대조되는 구조로 문인의 아취(雅趣)가 돋보인다. 


 그림 하단을 보면 경우 달빛 아래에 싸리나무로 엮은 울타리 사이에 스님이 등장한다. 스님의 행동을 보면 사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고 있다. 그림에 쓰인 화제를 읽어보면 왜 저 스님이 저리도 조심히 문을 여는지 알 수 있다. 화제는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에 문을 두드린다(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라 적혀 있다. 그림의 화제(畫題)처럼 화면 왼쪽 하단 수목(樹木)에 새들이 자고 있다. 이러한 사연이 있기에 스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다시 스님으로 돌아오면 스님의 위가 달빛이고 달은 마치 스님을 위한 가로등처럼 붉은 밝히고 있다. 이렇듯 김홍도는 감흥(酣興) 적이면서도 의취(意趣) 적인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이다.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는 가을의 고요함이라는 정수(精髓)를 담은 그림이라면 <월하고문도(月下敲門圖)> 가을의 은은함과 따뜻함을 한 화면에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3. 달빛 아래의 즐거움(月下喜樂).

3_1. 김규진의 월하죽림10폭병풍(月下竹林十幅屛風).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은 근대의 서화가이자 사진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불릴 정도로 당시 신미술을 수묵화에 적극 차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서화가들과 달리 사군자(四君子)와 서예에 집중하였으며 특히 묵죽(墨竹)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근대기 문인화풍(文人畫風)의 수묵화는 조선이라는 봉건시대와 달리 장식성이 극대화된 분야로 변천 (變遷)하였다. 김규진 역시 당시 수요자의 요건을 충족한 장식성이 웅장함이 돋보이는 묵죽을 많이 남겼다. <월하죽림10폭병풍(月下竹林十幅屛風)>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김규진, <월하죽림10폭병풍>, 375x130cm, 견본수묵,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월하죽림10폭병풍(月下竹林十幅屛風)>를 보면 10폭 병풍에 통죽(統竹)이 모여 죽림(竹林)이 되었다. 화면에 꽉 차 있는 통죽(統竹)을 보면 정말 대숲에 들어온 것 같은 공간감을 선사한다. 보름달은 왼편 상단을 꾸린 폭에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달을 감싼 구름이 3폭이나 할애하여 만월(滿月)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이 전 시대와 달리 달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표현하여 명확한 달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달빛 아래에 적힌 화제는 “가을의 소리는 귀에 가득한데 사람은 오지 않고, 거문고 뜯으며 긴 휘파람 부니 달이 떠오른다(滿耳秋聲人不到, 彈琴長嘯月來待).” 왕유의 시구(詩句)로 병풍의 그림과 일맥상통(一脈相通) 한다.


 앞서 본 그림들에 비해서는 은일(隱逸)하고 아취(雅趣)한 감흥(感興) 다소 부족하지만, 보름달이 가을이라는 계절감을 담았으며, 크고 묵직한 죽림(竹林)이 화면의 시각과 청각을 나타내었다. 병풍을 펼치는 순간 언제 어디서나 이곳은 가을의 보름달이 만연한 죽림이라는 성취감이 느껴진다.




4. 달을 벗 삼아 오래도록 취하다(玩月長醉).


 이번 한가위는 고사(高士)와 스님처럼 달을 벗 삼아 밤 하늘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혹은 나 홀로 대숲의 들어와 만월(滿月)의 달을 감상하는 상상을 하는 것은 어떨지 라는 생각도 덤으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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