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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 그림 읽는 남자 Sep 30. 2023

들여다본 전시. 6 /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조선양화(朝鮮養花)< 꽃과 나무에 빠지다>


 두 달여 만에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새로운 전시로 물을 열었다. 번에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전시는 조선 초기 문인인 강희안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참고하여 기획한 전시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평소 원예와 분재 등을 가꾸기를 좋아하여 집필한 책으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원예서이다. 총 16종의 화목을 정리하여 각 화목의 특징과 키우는 방법 등이 저술되어 있다. <조선양화(朝鮮養花)< 꽃과 나무에 빠지다>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나오는 화목으로 그려진 서화와 도자기를 중심으로 배치한 전시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참고하였지만, 강희안처럼 당시 조선의 문인들이 추구한 원예방식과 왕실이 화목을 활용하여 나타낸 위엄 등 조선의 화목을 잘 구현한 전시이다. 그중 인상 깊었던 그림 몇 개를 소개하려 한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홈페이지 / 제 3전시실 속 백화암





1. 세가(勢家)의 별장(別莊)과 문인의 정원. 

1_1. 세도가(勢道家)의 별서(別墅), 옥호정도().


 옥호정(玉壺亭)은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별서(別墅)로 현재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9길 일원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은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純祖, 1800~1834)의 장인이자 세도가(勢道家)의 문을 연 장본인이다. 

작자미상, <옥호정도>, 19세기, 150x193cm,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세도가의 별장이니 다른 양반들의 별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조순의 별서를 그린 <옥호정도(玉壺亭圖)>를 보면 삼청동 북악산 백련봉(白蓮峯) 일대의 실제 경관이 세세히 그렸다. 즉, 명당과 가까운 자리에 별장을 조성한 것이다. 


<옥호정도(玉壺亭圖)>는 일대를 관리하는 하인들의 공간인 바깥마당, 김조순과 더불어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 부인과 그 외 손님들을 맞이하는 안채와 마당, 마지막으로 옥호정 후원 일대와 산림의 숲이다. 더불어, 옥호산방(玉壺山房) 편액, 후원(後園)의 죽정(竹亭)과 산반루(山半樓), 별원(別園)의 첩운정(疊雲亭), 그리고 옥호동천(玉壺洞天), 을해벽(乙亥壁) 등 암벽 각자와 주요 조경물에 대하여 상세하게 명칭도 함께 적혀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이 담겨있다. 


 옥호동천(玉壺洞天) 암벽 각자가 새긴 공간은 마치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玉流川) 일원을 옮긴 것 같이 비슷하게 구성되어있다. 세도가(勢道家)로서 왕실의 권위와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보여준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투시와 평면을 섞어 건물과 경물을 배치하였다. 지금의 사고로 보면 구성배치가 재미있게 감상시켜준다.


 안채 방향으로 꾸며진 정원을 보면 조그마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화분과 분재로 여러 관상목(觀賞木)과 파초들이 배치되어 있다. 별서(別墅)생활과 마찬가지로 원예를 어느 정도 가꾸고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연못과 화단을 앞에는 포도와 삼림을 조성한 공간이 보인다. 지금이야 포도 전문 농가가 있을 정도로 산출이 간편 된 과일이지만 조선 시대만 임금께 진상할 정도로 재배하기 까다로운 과일이다. 


 옥호정(玉壺亭)은 자연경관을 즐기는 공간 이외 원예와 재배까지 가능한 별서(別墅)라 할 수 있다. 당시 김조순의 권력과 재력을 알 수 있는 좋은 그림이다. 




1. 세가(勢家)의 별장(別莊)과 문인의 정원.

1_2. 문인(文人)의 정원, 강세황의 지상평도(池上篇圖).

 

 <지상편도(池上篇圖)>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1748년 처남 유경종(柳慶鐘, 1714~1784)을 위해 그려준 것이다. 그림은 백거이의 시 <지상편(池上篇)>의 내용을 그림 시의도(詩意圖)로 문인이 추구한 정원의 생활이 담겨있다. 강세황은 바로 백거이의 정원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당시 조선의 건축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중국의 문예(文藝)가 꽃피운 소주와 항주 정원형식이다. 당시 조선의 문인들이 중국 강남의 문인들을 흠모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송(宋, 960~1276)나라의 소동파(蘇軾, 1037~1101)와 미불(米芾, 1051~1107) 그리고 주자(朱熹, 1130~1200) 역시 강남의 문인이다. 명(明, 1368∼1644)대에는 문인서화가(文人書畵家)이자 오파(吳派)라는 화파를 만든 심주(沈周, 1427~1509)와 문징명(文徵明, 1470~1559)도 강남의 문인이다. 청대의 양주팔괴(揚州八怪) 역시 강남이다. 

 

강세황 역시도 조선의 문인이자 18세기 조선 예원(藝苑)의 총수로 이름을 날린 서화가(書畵家)다. 그렇기에 다른 문인들처럼 중국의 강남 문예(文藝)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사례이다. 


강세황, <지상편도>, 1748년, 20x237cm, 지본담채, 개인소장


횡면(橫面)의 <지상편도(池上篇圖)> 물기를 얻은 듯 맑은 담채로 그려져 있다. 강남 지방의 안개가 자욱한 환경을 그림으로 옮긴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색감도 뚜렷하게 담채(淡彩)하여 삼림과 원예가 풍부한 정원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채보다 큼직한 괴석을 정원 건물 바로 옆에 배치하였다. 크고 산만한 바위가 있을 정도로 백희기의 정원은 웅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왼편의 연못은 강가와 호수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마치 자연과 연결된 지형으로 무의자연(無意自然)과 가깝게 느껴진다. 정원에는 어린 동자들과 학아 무리들이 어울려져 있는데 학은 고고한 선비를 의미함으로 정원의 주인이 학보다 고아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의미를 투영한 것 같다.


 <옥호정도(玉壺亭圖)>는 삼림과 원예로 꾸며진 별장(別莊)으로 세도(勢道)의 위엄을 나타내었다면, 강세황의 <지상편도(池上篇圖)>는 문인이 지향(志向)하는 자연과 교류를 담아내었다.           




2. 와유(臥遊)하는 겸재(兼齋).

2_1. 정선의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이 그린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는 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그림은 <경교명승첩> 하권 첫 화면에 장첩(粧帖) 되어 있다. 대략 50대 초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산수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도 능한 것을 보여준다.

정선, <독서여가도>, 1676년, 17x24cm,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정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사랑채 난간에 기대 누워서 정원의 분재를 감상하고 있다. 분재의 꽃은 아마 작약으로 귀태가 화사하다. 아마 작약의 향이 은은하여 분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더 해준다.


 인물이 손에 들고 있는 부채와 책이 쌓여있는 책장의 문을 보면 산수가 그려져 있다. 작은 화면에 또 다른 그림이 있는 재미있는 구성과 더불어 본인이 산수의 일가(一家)를 이룬 화성(畫聖) 겸재 정선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랑채의 지붕은 기와가 아닌 초가이지만, 창문 넘어 보이는 소나무의 늠름한 자태를 보면 상당한 정원을 가진 집안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다양한 서책과 정갈한 의복을 보면 상당히 부유한 문인(文人)임을 말없이 알려준다. 


 그림 한 점으로 당시 겸재 정선의 경제적 위치와 사회적 서열을 유추해 볼 수 있어 참 재미있는 그림이다. 실제로 정선은 성실한 화업(畫業)으로 상당한 부를 이룬 인물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좋은 그림이다.




2. 와유(臥遊)하는 겸재(兼齋).

2_1. 정선의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종묘(宗廟) 선대 국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王位)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하던 왕실의 사당이다. 왕조의 종실(宗室)을 상징함과 동시에 국왕의 통치 기반이 되는 곳이다. 반대로 사직단(社稷壇)은 1년에 네 차례의 대사(大祀)와 선농(先農)·선잠(先蠶)·우단(雩壇) 등 토지신과 곡신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 외에도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祈雨祭)도 함께 거행하던 장소다. 그래서 종묘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사직단이다. 


 종묘는 향나무를 심었다면 사직단은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향나무는 당연히 제사 때에 필요한 상징물로 심은 것이지만 사직단도 제사하던 곳인데 향나무가 아닌 소나무를 심었다. 그 이유는 소나무의 변치 않는 푸르름처럼 국가의 기틀이 영원토록 이어지길 바라는 염원이다. 더불어 농본국가임으로 농사의 풍년을 의미하는 바도 있었다고 한다.


정선, <사직노송도>, 18세기, 61x112cm, 지본담채, 고려대학교박물관


 정선이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바로 사직단의 노송을 그린 것이다.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를 보면 나무를 지탱하는 기둥이 12개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사직단의 소나무가 영물로서 나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림도 1m가 넘은 것을 봐서도 상당한 크기를 지닌 소나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직송이 옆으로 뻗어있는데, 이러한 소나무를 반룡송(蟠龍松)이라 한다. 반룡(蟠龍)이라는 승천하지 못한 용처럼 생겼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당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사직송은 신비한 기운을 가진 소나무로 여겨왔다. 그렇기에 사직단 서촌에 살았던 정선이 그 영업함을 간직하고자 사직단에 찾아가 사직 송을 화면에 옮겨 담은 것이 아니냐는 재미있는 사설(私設)을 써본다. 




3. 각양각색의 화목으로 장식된 <조선양화(朝鮮養花)>


 비록 인상이 깊었던 몇가지의 그림으로 전시를 살펴보았지만, 도자기와 병풍 그리고 고가구로 구성된 고아한 전시이다. 우리 선조들이 꽃과 나무 그리고 여러 식물과 화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 지도 알 수 있는 좋은 전시이다. 더불어 자연을 얼마나 가까이 대하고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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