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했다.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내 나이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인생 드라마로 ‘나의 아저씨’를 꼽으며, 한참을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주제는 자신들의 인생영화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었고, 난 언제나처럼 내 인생영화로 ‘대부’와 ‘블레이드 러너‘를 꼽고, 그 영화들에 대한 극찬을 한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난 친구들에게 진실되지 못했음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느낀다. 아니, 사실 친구들에게 진실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 스스로에게 진실되지 못함에 가책이 느껴진다.
사실 나에게 인생영화는 따로 있다.
바로 영화 ‘클래식’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를 봐 오며 그렇게 울어본 적도 없고, 감동을 받아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사람들에게 내 인생영화라고 하기에는, ‘대부’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유수의 평론가들로부터 명작 소리를 듣는 영화도 아닐뿐더러, 내가 이 영화를 만난 계기가.. 실로 ‘알흠’답지 못해서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6,7년 전.
전 직장을 다닐 때 이야기이다.
나이도 제법 먹었겠다, 이제 부모님 댁으로부터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남자 혼자 오피스텔에 살며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었기에, 주로 퇴근 후 내가 했던 일은 컴퓨터로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나 기타 영상 등을 보는 일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로 가서 여느 때처럼 동영상을 다운로드하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음흉하고 야한 제목의 동영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잔뜩 흥분한 채, 난 동영상을 튼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제목과는 전혀 다른 영상이 화면에 뜨기 시작한다.
‘살색 러브 액션‘을 기대했건만 서정적인 영화가 나온다.
그렇게 난.. 의도치 않게 영화 ‘클래식’과 조우하게 되었다.
‘아이. 씨. 이게 뭐야?’
뭔가 김 빠지는 느낌으로 5분만 보고 다른 영화를 다운로드하자는 나의 생각은 10분, 20분, 1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완전히 바뀌어 화면에 빠져 초집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승우가 장님이 되어 나타나 손예진과 조우하는 장면.
살면서 영화를 보며 그렇게 꺼이꺼이 울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 내내 흐르는 서정적인 감성, 신파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눈물.
그 당시에 생각하기에도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내용들이 올드하고 유치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라 생각했음에도, 이 영화가 나에게 준 감성적인 충격은 지금까지 봐왔던 여느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나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 같고 (클래식이란 영화에 대한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었기에, 너무 뻔한 내용이고 다 예측 가능한 신파다..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감정이란 것이 건전함이 +100, 불건전함이 -100이라고 한다면, 영화를 보던 시점에 내 마음가짐은 불건전함이 -100 만렙을 찍었다가, 갑자기 서정성으로 칠갑을 한 건전한 영화로 +100을 찍었기에, ‘0’이라는 상태에서 ‘+100’의 서정적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닌, ‘-100’에서 급 ‘+100’으로 감정이 이동하여 200이라는 높낮이를 겪었기에 그 감동이 배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영화 클래식은 나에게 말도 안 되는 감동을 준 영화이지만, 남들에게 인생영화를 이야기할 때에는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영화가 되었다.
육아휴직을 할 때, ‘나의 아저씨’를 접하며 인생드라마를 만나 감동에 빠진 후, 갑자기 영화 클래식이 생각이 났다. 무엇인가 서정적인 감동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0’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객관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십 수년만에 난 영화 클래식을 다시 본다.
미치겠다.
십 수년 전에도 꺼이꺼이 울었는데, 이번엔 그때보다 더 운 것 같다.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느라 거실에서 방, 방에서 주방으로 옮겨 다니는 와이프는 꺼이꺼이 우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한참을 바라본다.
“아니. 왜 그래? 뭔데?”
“아.. 몰라.. 나 미쳤나 봐.. 왜 이렇게 슬프지?”
이번에도 클래식에 감동을 받은 내가 싫다.
다시 강조하지만 올드하고 뻔한 신파이다.
과거에는 불건전한 마음이 건전한 마음으로 급 전환되었기에 큰 감동을 받은 거고, 저 영화를 내 인생영화라고 하기에는 뭔가 존심이 상한다.
‘이번에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며 남성호르몬이 원활하게 생성되지 않기에, 내 감정선에 이상이 생긴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까지 울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무엇인가 기분이 꿀꿀하거나 감정의 큰 기복을 느끼고 싶을 때는 영화 클래식을 본다.
첨부터 볼 필요도 없다.
조승우가 장님이 되어 나타나 손예진과 만나는 장면.
10분만 보면 된다.
앞뒤 하나 안 봐도, 그 장면만 보면 꺼이꺼이 울게 된다.
‘아… 이걸.. 인생영화라고 말해야 하나?’
조심스레 인생영화에 대해 커밍아웃을 할까.. 생각해 본다.
P.S. 그러나 아직까지 지인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글로 읽는 독자분들에게만.. 살짝쿵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