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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니 Dec 23. 2022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까

크리스마스 트리를 팔았다. 내 키보다도 몇 뼘은 큰 트리였다. 작년 겨울 신나게 트리를 장식하고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지만, 이번에는 트리를 꾸미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트리에 달린 전구가 오히려 전기세를 축내는 것 같은 느낌에 차라리 당근마켓에 올려 판매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대폭 오른 전기세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었다. 버젓이 정가가 적힌 책을 가리키며 얼마에 책을 파느냐는 일부 손님들처럼, 배송비 수준으로 올린 트리 가격을 깎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일이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트리를 팔아야하는 마음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트리를 판 날 B급 취향을 연 7시간 동안 손님은 한 명뿐이었다. 누군가 이 말을 들으면 설마 그럴리가 있냐고 되묻겠지만, 책방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척 당연하고 흔한 일이다. 다른 책방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알 때면 한숨이 나오는 한편 묘하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불안한 안도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얼마 전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책방인 달팽이책방의 달팽님과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에 문을 연 지금책방의 지금님, 그리고 나 이렇게 포항의 독립책방지기 셋이서 조금 이른 연말 파티를 했다. 한껏 들뜬 채 시간을 보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집에 와서야 알았다. 그날 우리가 한 대화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누구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무던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제 더는 무뎌질 마음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온갖 진상짓을 하거나 민폐를 끼친 손님들 이야기부터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들, 그리고 책방을 일종의 간이역이나 SNS 촬영 장소로만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10년 된 책방이든 1년 된 책방이든 그 존재 가치가 날로 흐려진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매년 늘어나고.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을 소비하는 추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슬픔은 나누면 줄어든다고 하던데, 어려운 상황인 세 명이 만나 웃고 떠드는 동안은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그런 일종의 연대감을 내가 안도감으로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방을 하다보니 나는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다. 그날 뒤늦게 합류한 독립출판물 포포포 매거진 대표가 오기 전까지는. 매년 재고를 떠안는 출판사도, 손님이 오지 않는 책방도, 자재값이 올라 비싼 책을 구입할 수 밖에 없는 소비자도 모두 지는 시스템. 마치 제로섬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승자는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이 이 시스템의 승자이니까.

자본은 스스로 자본을 불린다는 것이 자본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겁도 없이 책방 사업을 벌였으니. 막막함과 불안함이라는 벌을 받는 건가 보다. 최근 임대차 계약서를 본 뒤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B급 취향을 연 뒤부터 걱정을 늘 안고 지냈다는 것도. 불안과 한몸처럼 지내다보니 시간이 이만큼 흐른지도 몰랐다. 계약서를 다시 넣으면서 자연스레 책방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한 생각이었지만 책방 문을 닫는 날을 상상하니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놈의 주책맞은 눈물은 겨울만 되면 다시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려고 한다.


B급 취향에 오셔서 일부러 책을 사고, 디저트를 주문하는 손님들께 형용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매월 수익의 대부분을 건물주에게 송금하는 처지라, 언젠가부터는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이 더 크다. 나와 B급 취향을 위해 기꺼이 지출하는 돈인데도, 손님들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그 효용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자꾸 죄스러운 마음만 커진다. B급 취향을 지키려는 내 마음이 이제는 욕심처럼 느껴져 매번 죄인이 되고 만다. 셀 수 없이 많은 분께 빚을 지며 1년여를 보냈다.


다시 겨울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데 책방은 늘 겨울인 것 같다. 겨우내 잔뜩 웅크리고 난 뒤에도 봄은 오지 않는다. 책을 찾는 사람은 계속 줄어들기만 하니까. 나만의 체온으로 이 공간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라 봄에도 역시 춥다. 책방을 따뜻하게 비출 봄볕은 언제야 올는지 세어봐도 소용없으니 애꿎은 달력만 넘긴다. 책방 문을 닫고 폐업하면 내게도 봄이 올까?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자본이 없는 나는 결코 이 사회에서 승자가 될 수 없으니까. 팍팍하고 매운 현실을 이렇게 배운다. 앞으로 이곳을 얼마나 더 지킬 수 있을지 단언하기 어려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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