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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미스타 Aug 18. 2024

엄마의 인공위성

3월 1일


꺼지지 않게 향불을 보호하느라 거의 무수면 상태로 지난밤을 꼴딱 새우고 나니, 내가 지금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제정신으로는 못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하루 8시간은 꼬박 자야 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긴장상태로 깨어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침에 간단히 제사를 올리고 음복을 하라는데 나는 별로 땡기지 않았다. 엄마집에 살면서 가장 많이 싸웠던 것 중 하나가 입맛이었다. 엄마는 나물 반찬을 좋아하고 많이 만들었지만 나는 나물이 싫었다. 질겅질겅 씹히는 식감도 싫었고, 나물 반찬 특유의 물 비린내가 나는 것도 싫었다. 술과 나물만 잔뜩 올라가 있는 제사상에서 내가 손대고 싶은 것은 별로 없었고 어차피 식욕도 없었다. 


숙모가 막내삼촌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주었다. 아마 본인의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직접 와서 가장 많이 울었을 사람이 바로 막내삼촌이었다. 5남매의 맏이인 엄마와 막내인 삼촌은 나이차가 꽤 났고, 주변 모든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엄마가 사고 치는 말썽꾸러기 막내삼촌(뿐만 아니라 삼촌 세명 모두)을 자식처럼 돌보고 키운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막내삼촌은 조카인 나와 12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막내삼촌과, 나와, 막내삼촌의 아들인 사촌 동생이 각각 12살씩 차이가 났는데, 농담으로 '한 집에 같은 띠가 3명 있으면 잘 산다는데!'하고 깔깔깔 웃은 적도 있었다. 


큰 수술을 여러 차례 하고 '항암'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운 치료를 하게 되면서부터 엄마는 외갓집 식구들에게서 오는 연락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에게 연락하는 외갓집 식구들이 엄마에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전화가 와도 시큰둥하게 받거나 의도적으로 받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 잘라지는 것이었다면 엄마도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결국 큰일이 나기 직전에 뛰어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야 마는 것이 우리 엄마였다. 


엄마도 당신 한 몸 추스르기 쉽지 않았던 어느 날, 막내삼촌이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강이 좀 안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는 걷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엄마는 삼촌과 숙모에게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했냐!'하고 역정을 냈지만, 결국 대구 병원에 다녀도 차도가 없자 엄마가 다니는 서울 병원에까지 데리고 와 검사를 하게 했다. 이대로 내가 모른척 하면 엄마 혼자 이고지고 생고생을 할 게 뻔해 보였기 때문에 나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한걸음 떼기도 힘든 삼촌을 숙모와 내가 부축해 겨우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까지 갔다가 서울 언니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운전을 해서 서울까지 갔을 텐데, 그때는 그렇지도 못했다. 

어쨌든 막내삼촌에게는 누구보다도 의미가 있는 큰누나였을 텐데, 자신이 이리 아파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으니 장례식장에도 가보지 못한다며 눈물을 참는 모습이 영상통화 너머로 보였다. 좀 더 길어졌다가는 삼촌이 정말로 펑펑 우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서 그만 끊으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마도 통화를 끊고 혼자 있는 집에서 펑펑 울지 않았을까. 이리저리 사고도 많이 쳤지만 눈물도 많은 파워F 삼촌이었다.


장례식장에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그와 반대로 억지로 입고 있었던 상복 치마는 거추장스러웠다. 나와 언니는 상복 치마를 벗고 각자 편한 옷을 입었다. 나는 미리 챙겨갔던 바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상복을 벗는다며 비난하려 시동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하루 입고 있었으면 됐다. 엄마도 상복 치마 입고 앉아있는 나보다 바지 정장 입고 있는 내가 더 나 답다고 생각할 거다.'라며 잔소리를 차단했다. 여동생의 결혼식에서 내가 입었던 바지정장을 보고 엄마가 평소에도 이렇게 깔끔하게 입으라며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어제는 오후 늦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돌려서 조문객이 거의 없었고 오늘은 좀 더 많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코로나 상황도 그렇지만 연달아 있는 휴일에 다들 사전 계획이 다 있었을 터. 어제보다 더 한가한 빈소에 도우미 선생님들은 네 분이나 와 계셨다. 장례식장에서 기본적으로 보내주시는 선생님 두 분과, 이모 회사에서 보내주신 선생님 두 분. 도우미 선생님들은 일거리가 너무 없어서 우리의 눈치를 봤고, 나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하는 도우미 선생님들께 손님이 없을 때는 쉬셔도 된다며 편하게 계시라는 말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손님도 거의 없고 이제는 뭐라도 먹어야 해서 여동생의 배우자와 술 한 잔을 기울였다. 언니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여동생은 아기를 돌보느라 지쳐보였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이상하게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 주량을 넘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22분마다 울리는 알람에 맞추어 향불을 붙이러 일어났다. 사실 이튿날에는 알람이 울릴 때마다 나보다 제부가 더 빨리 움직여 불을 붙여 주었다. 피가 섞인 가족들도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을 눈치있게 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엄마 아들이 코로나 양성이 아니어서 장례식장에 와있었다면 이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을까? 제부 말로는, 언젠가는 자기도 겪어야 할 일이니 한 번 해 보는 것이라 했지만, 그래도 나 혼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을 누군가 함께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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