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걱정마세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성적인 나에게 사람을 만난다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압박감, 스트레스, 피곤함, 괴로움. 하기 싫은 것을 할 때 생겨나는 것들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좋은 학교에 가면 뭐가 좋은지? 돈을 많이 벌면 뭐가 좋은지? 난 그때 도저히 그 이유를 몰랐다. 그때마다 어른이었던 선생님들은 내게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편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정말? 내가 공부 잘하면 난 편하게 살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보장하지?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니깐? 100%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설령 그게 맞더라도 난 안 할 테지만 말이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 나는 한 반에 40명 가까이되는 친구들 중 30등 이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 뒤에 있었던 친구들은 교과서를 거의 들고 오지 않을 정도의 친구들이었지만 난 나름 착실한 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 말을 잘 들었고, 웬만해서는 딴짓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항상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은데 밖에 나가고 싶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들을까?'
'오늘 저녁에는 티브이에서 무슨 재미있는 영화를 할까?'
나의 망상은 항상 꼬리에 꼬리를 아주 길게 물고 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성적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아무도 나의 성적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으며, 이유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낙오자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비친 나의 모습은 낙오자다. 이미 낙오자가 된 내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겼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우연히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지나가는 걸 봤다. 한 세 명 정도 되는 그 여중생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걷는 내내 웃으며 내 앞을 지나갔다.
갑자기 내 앞을 지나가는 여중생들의 얘기가 궁금해졌다. 신기한 것은 내가 그 여중생들의 얘기에 집중해 들으려고 하니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여중생들은 각자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어제 무슨 선물을 받았고, 오늘 학원에 다녀와서 보기로 했다는 둥 그냥 별다른 얘기가 아니었다.
'아... 다른 친구들은 다 여자친구가 있겠구나?'
혼자 생각했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기면 어떤 느낌일지가 궁금했다. 기념일도 챙기고 선물도 주고받고 벤치에 앉아 서로의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물론 나에게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벌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날 부모님의 권유로 처음 학원에 가던 날이었다. 5층짜리 건물이 전부 학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와 집 중간에 있는 보통의 동네 학원이었다. 학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그때까지도 왜 학원까지 가야 하는지 몰랐다. 어차피 나는 공부로는 될 수가 없는 아이인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걱정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일단 3개월만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학원생활은 시작됐다.
학교보다는 작은 건물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 온 친구들이 있어서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다. 물론 여자아이들도 있어서 더 신기했다. 내가 제일 못했던 과목은 수학과 영어였는데 비싼 학원비 때문이었는지 부모님은 수학 과목만 먼저 받기를 원했다. 서로 다른 학교의 친구들과 여자아이들... 좁은 교실, 좁은 창문, 남자아이들의 땀냄새, 먼지 냄새. 내가 기억하는 학원 교실은 그랬다. 원장선생님에 이끌려 들어온 교실에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원장선생님은 유독 나에게 친절하셨고 응원해 주셨다. 한참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반은 수포자를 위한 교실이었다. 맞다. 수학을 포기한 아이들만 모아논 교실이다. 그중에 내가 가장 성적이 안 좋았고, 그래서 원장선생님이 그렇게 내게 칭찬하셨던 것이다.
수업 중에 왼쪽에 있던 창문을 바라봤는데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엄청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의 아이였다. 예쁘지는 않았지만 바가지 머리를 하고 열심히 수업을 듣는 여자아이였다. 며칠 동안 그 아이를 봤는데 그 아이도 친구가 없어 보였다. 누구도 그 친구랑 말하지 않았고 그 친구도 누구랑 말하기 싫어 보였다. 쉬는 시간에는 혼자 자리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학원이 끝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집에 가기 바빠 보였다.
'여기도 나 같이 친구가 없는 얘들이 있구나?'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던 어느 날 학원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마시려고 기다리던 중 그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미안한데 혹시 오백 원만 빌려줄 수 있을까?"
놀란 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있던 오백 원짜리 동전을 아무 생각 없이 줬다. 그 아이는 동전을 받고 언제 돌려줄 건지도 말하지 않은 채 음료수를 뽑아 들고 다시 교실로 갔다. 사실 나도 오백 원을 돌려받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전에도 이렇게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은 많았다.
그렇게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던 내 뒤에 누군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분명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것이 맞다. 내가 빠르게 걸으면 같이 빠르게 걷고 느리게 걸으면 다시 느리게 걷는 아이가 있었다. 바로 그 친구였다.
상숙이는 내 첫 여자친구였다. 나랑 비슷하게 친구가 많이 없었고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친구였다. 물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상숙이의 다이어리는 마치 작은 문방구 같았다. 온갖 색볼펜으로 아름답고 멋진 문구들이 적혀있었고, 세상에 귀여운 스티커는 다 여기 있다는 듯 도배되어 있었다.
조금은 특이해 보이는 상숙이와 나는 그날 수많은 얘기를 하며 같이 집으로 걸어갔다.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 상숙이와 나는 힘든 것들이 매우 비슷했다. 친구들을 사귀지 못하는 것,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 혼자 사색을 즐긴다는 것 등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던 우리는 그날 이후 매일 같이 수많은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서로에게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예쁘게 포장해 선물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에게는 첫 여자친구가 생겼고, 3학년에 올라가기 전 6개월 동안 그 행복했던 시간들은 계속되었다.
사랑까지는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꽤 많이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하고 싶은 일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