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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아빠 Apr 26. 2024

#4. 원주민 되기

너 서울에서 왔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먼저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원주민. 원주민들과 친해지면 새로운 환경에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물론 그 원주민들이 내 편일 때만 가능하다. 원주민과 친해지는 방법은 많이 있다. 선물을 주거나 원주민과 같은 행동을 하거나, 같이 웃거나, 좋을 말을 해주거나, 물건이나 돈을 줄 수도 있다. 때로는 원주민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주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원주민과 친해지는 방법! 그 수많은 방법 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전학 온 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나한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 종혁이는 내게 가장 먼저 말을 걸어준 친구였다.  


"야~ 너 서울에서 왔다며? 난 서울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좋겠다~"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은 내가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설정이었다. 물론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은 선생님 질문에 답하는 내 입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서울말!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흔하지 않은 서울사람! 그 사람 자체가 관심사였다. 사실 난 서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안산에서 전학을 왔다. 하지만 친구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으나 자신들과 다른 사람. 그것이 신기한 것이었다. 


종혁이는 무언가 항상 바쁜 친구였다. 놀 때도 항상 정신이 없었고 수업시간에도 낙서를 하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 알 수 없는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고, 몰래 만화책을 보기도 했다. 내가 본 종혁이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아마 나한테 처음 말을 걸었을 때도 종혁이는 해야 하는 무언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 반에는 키가 크고 얼굴이 정말 잘생긴 용석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한마디로 전교 사람들이 다 아는 잘생기고, 멋지고, 키 크고, 말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유명한 친구였다. 우리 학교의 연예인이었다. 이 친구가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면 전교생이 모두 쳐다보곤 했다. 그런 용석이 옆에는 항상 종혁이가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종혁이는 무언가를 계속 용석이한테 얘기하고 있었고 용석이는 그런 종혁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용석이는 종혁이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용석이의 다른 쪽에는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낙준이라는 친구는 항상 말이 없었고 용석이보다 뚱뚱하고 무섭게 생긴 친구였다. 용석이와 종혁이 그리고 낙준이를 뒤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 나라의 왕과 신하들 같았다. 


그리고 몇 개월간 나 혼자 2학년 교실을 청소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나에게 말을 걸어준 친구는 종혁이를 포함해서 한 5명쯤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얘기하는 것보다 선생님과 얘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말을 많이 걸어주셨던 것 같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나는 항상 아침에 등교할 때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오늘 갑자기 누가 나한테 말하면 뭐라고 말하지? 아... 실수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비 오던 날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빗속에서도 격렬한 축구는 계속됐다. 젖어 있는 운동장에서 미끄러지는 친구, 비가 오건 말건 승부욕에 불타올라 소리치는 친구, 뛰기 싫은 친구, 골을 넣고 신나서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는 친구. 하지만 난 그런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나는 비를 맞는 게 싫었다. 비를 맞으면 옷과 신발이 젖고 그 상태로 교실에 들어가면 계속 찝찝해서 너무 싫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나는 멀리서 창문으로 지켜봤다. 나 나름대로 경기의 결과를 예측하는 재미는 꽤 괜찮은 놀이였다. 


'오늘은 다들 10반 얘들이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우리가 이기겠군!'

'아 쟤는 다리가 다쳤는데 제대로 뛸 수 있으려나?'

'와! 쟤는 진짜 잘 뛰네?'


수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친구들에 축구를 속으로 중계했다. 갑자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와서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무슨 오해라도 살까 봐 나는 창밖에서 떨어져 내 책상에 앉았다. 몇 분 후 누군가 복도에서 미친 듯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거기 너 전학생! 너 축구 좀 하냐? 나와~!"


나는 그 친구 목소리에 홀린 듯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다. 그렇게 나는 용석이와 종혁이 그리고 낙준이라는 유명한 친구들과 같이 축구를 했다. 그렇게 나도 원주민이 되어갔다.


가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까먹을 때가 있다. 나는 서울 사람. 너는 전주 사람. 우리들 모두 심장이 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표정, 같은 움직임, 같은 목표를 가질 때 비로소 원주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원주민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자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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