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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겨울 Jan 24. 2024

그 후, A는...

01

 A의 아버지는 광고 회사의 사장이었다.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회사를 차리기 전에는 삼성을 다녔다고 한다. 끓는점과 어는점 사이에서 오르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살아온 그에게 온 가구에 붙은 ‘빨간딱지’는 이제 그만 기화나 승화해도 된다는 천명(天命)이었을 지도 모른다.


 기어이, 어쩌면 치열했을 시간들까지 전부 덮어버린 빨간 가구 앞에서 그는 매일 막걸리를 마시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A는 연민의 역전을 맛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엷은 동정의 이면에 존재한 감정은 명백히 원망이었지만 당신의 노력이, 열정이, 의욕이 부족하지 않았고, 불가항력이었다 믿고싶기도 했다. 그래서 A는 확신없는 믿음에 '어쩌면'이라는 말로 아버지의 과거를 대충 퉁쳐버린다. 


 집에 돌아오면 늘 닫혀있던 안방문을 열어보면 A의 아버지는 침대와 창문 사이의 바닥에 앉아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그의 안주는 김치뿐이었고 마치 합당한 벌이라 여기는 듯, 하늘을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차려진 밥에는 손대지 않았다. 간혹 A가 안방에 들어가 간단한 인사를 던지곤 했는데, 굽고 쳐진 어깨에 부딪혀 돌아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 한숨으로 가득 찬 방에 있으면 금새 축축하게 취해버릴 것만 같아 서둘러 나왔다. 시간이 흘러 당시를 복기하는 A는 ‘분명 바닥에 술을 기울였던 당신도 울고 싶었을 테지만 고작 목놓아 우는 것에도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으리라.’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친척의 집으로 도망친 밤도, 집을 울리는 오고 가는 고성을 들을 자신이 없어 집 주변을 한참을 서성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들어가 잠을 청한 밤도 있었다. 다행히 쉽게 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리고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이혼을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일 정신적 성장을 감안해 설정되었던 시기는 예정보다 일찍 찾아왔다. 

 가족의 새로운 형태가 눈에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물리적 평화에 마음은 한결 평온했다.


 A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겠다던 두 사람을 한사코 뜯어말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꽃다발과 함께 학교 밖에서 졸업식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A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감정의 실타래가 얼굴 근육을 꽉 동여매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A는 친구네 가족을 찍어줄 때의 기억을 더듬어 친구가 지었던 표정으로 사진을 남겼다. 생에 한 번뿐인 날, 차라리 혼자이길 바랐던 건 밥이라도 편하게 먹고 싶어서였다. 마지막으로 넷이 먹었을지 모를 그 밥과 다시는 안 올 날을 평생을 그리워한다.     


 그 후로 10년, 일찍 타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A는 위경련이나 디스크로 밤잠을 설치는 날이 잦은 편이지만 고통과 외로움을 호소하기보다 이불을 휘감고 혼자 끙끙 앓기를 택했다. 소식이 오가는 대교가 무너지며 연락에는 보다 많은 공수가 들어갔고, 종단에는 ‘밥은 먹었는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는 ‘밥 먹었겠지’, ‘아프지 않겠지’로 바뀌었다. 따뜻한 번거로움보다 줄여나간 연락의 빈도에서 오는 편의를 취한 것이자 전파로 전하는 근황이 어쩌면 불길한 상상을 자극할 수 있다고 자위한 것이었다.




02

 이혼가정의 자녀로서의 경력이 쌓여가는 나(A)는 이혼이라는 액션에 가정이라는 객체를 더한 ‘이혼가정’이라는 표현이 썩 탐탁치 않다. 줄어든 머릿수와 같이 본래의 가정의 기능을 반쯤 상실한 듯 느낌을 주는 표현이 옆구리에 보이지 않는 정을 박아 사람을 위축시킨다. 온전한 가정에서 파생된 부모, 자식간의 책무나 마음가짐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밝히기는 어렵다. 

 물론 가볍게 다룰 주제도, 그닥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벼랑에서 가정의 붕괴를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그깟 말 한마디 아무렴 좋을 터이다. 비교적 잔잔한 이혼을 맞이한 나 같은 사람이나 말 한마디에 집착하고 파고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TT 서비스의 발달 이전에는 온 가족이 저녁을 먹으며 챙겨보는 ‘국민 드라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류의 드라마에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과 결혼하기를 반대하지만 ‘기어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클리셰를 심심치 않게 활용되었다. 그만큼 이혼이 개인과 속해있던 가정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며,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반드시 결핍이 존재할 것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고, 인식의 흔한 저변을 고스란히 반영한 전개였다. 

 같은 이유로 이혼에 대한 연민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민의 일환으로 가족을 주제로한 이야기를 의식해서 피하는 온전한 가정으로부터의 불완전한 배려는 금방 눈에 들어와서 거슬렸는데, 영화 ‘기생충’처럼 내게 냄새라도 배어버린 건지, 그들의 편견대로 가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건지, 그런 날에는 조금은 심란했다.


 과거와 달리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가벼워진 지금은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도 못지않게 개인의 행복이 중요시되었고, 이혼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선택지가 되어가는 듯 하다. 실은 쓰리게 아프고 고되겠지만 그 아픔을 더이상 혼자 끌어안고 숨기지 않아도 된다. 

 나아가 언젠가는 이혼과 가정의 영역을 명확하게 나누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며, 저녁에 부대찌개를 먹을지, 된장찌개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온다면 우리는 선택의 무게까지 쉬이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비단 이혼만이 아니라 지지받지 못하는 모든 선택에서 동일하게 적용시켜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OO엄마’, ‘OO아빠’가 아닌, 켜켜이 먼지 쌓였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심한 그들의 비이성적이고 합당한 결단에 인위적인 응원과 결코 따뜻하지 않은 동정보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보통의 시선을 보낼 줄 알아야한다. 행위와 상황을 전제로 하는 행복과 달리 마이너스의 감정은 충족요건의 제약이 뒤따르는 감정의 하한선이 없기에 그날에는 ‘편부모 가정’이라는 비정하고 딱한 표현대신 그들의 상처까지 감싸 안아줄 말을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개방적인 세상에서도 전 배우자의 외도까지 낱낱이 고하는 글만큼은 끝내 쓰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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