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myungdan Dec 10. 2023

너의 이름은

어제 그리고 내일



홍미가 왔다. 5년만이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막 다녀간 뒤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애틋한 마음으로 친구들이 홍미 없는 고향 장례식장에 다녀왔었다.

브라질은 참 멀기도 하다. 이번에도 26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겠지.

고향 친구들은 당연히 모이는 거다.

기차표를 미리 예매했다.




모임은 여행이 된다.

흩어져 있으니 어딘가에선 모여야 한다. 멀리 움직이기를 겁내하는 울산 총무와 대구에서 초등교사로 일하는 친구를 배려해 북방한계선은 대전쯤이다. 이번엔 경주다.

나름대로 시간을 계산했음에도 지하철 타이밍이 꼬여버리니 위태롭다. KTX 출발 시간이 10분 남았으니 서울역에선 뛰어야 한다. 나이 들면 뛰고 싶어도 못 뛰니 뛸 수 있을 때 뛰어야 한다는 것이 어느 때부턴가의 내 지론이다. 숨이 턱에 찬다. 두 번의 에스컬레이터가 이렇게 번거롭고 힘에 부친 적이 없었다. 두줄 서기를 하지 않아 낭비되는 에스컬레이트를 불만스러워했는데 오늘은 비어 있는 그 한 줄이 고맙다.




요 며칠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추우니 캐리어 바퀴소리도 돌돌돌이 아니라 드르륵 드르륵 뜀박질이다.

역시 한류는 서울역을 춤추게 한다. 외국인이 반인 듯하다. 삼삼오오 추워도 얼굴엔 미소다. 서울역내를 즐길 시간은 없다. 이른 저녁을 먹을 일정이라 간단하게 소금빵과 차로 꽉찬 여행객들의 틈에 끼어 여행기분을 내보려 했는데 그 일미를 빼앗겨 버렸다. 부푼 여행 가방 사이를 채우는 버터향과 커피향과 소담소담해지는 대화는 여행자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데 말이다.




13호차, 멀기도 하다. 아슬아슬, 기차를 타자마자 출발이다. 코트를 개 선반에 올리고 호흡을 고르자니 비로소 안심이다. 몸을 의자에 잠시 묻고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퍼질 대로 퍼져 눈부시다. 내 마음에도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기차는 설렌다.

흠흠..진한 소스 향이 콧속으로 확 풍겨 온다. 쾌적한 실내에 방해가 되긴 하지만 몸은 반응한다. 통로 옆 좌석의 젊은 외국인 두 명이 조용조용 햄버거를 맛있게도 먹는다. 시장기가 느껴진다.




광명역에서 미옥이가 탔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 아, 여행이구나 싶다. 큰애 상견례 때 산 옷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여자들은 모임을 계기로 옷을 사는 경우가 있다. 다른 친구들도 내 예측을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경조사를 빼면 1년에 2번의 모임이니 마음은 여러 모로 고조된다. 늘어지고 무릎 튀어나온 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부터 한껏 끌어올리고 시작하는 여행이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미옥이는 사진작가다. 여행의 신성한 의식, 사진을 위해서도 공들일 일이다.

이 때의 옷은 소비가 아니라 여비다.




고구마차로 요기를 해 볼까 했는데 가는 곳마다 없더라며 미옥이가 라떼를 건넨다.

디카페인이 아닌 투샷 다 들어간 남다른 사이즈의 커피를.

어차피 잠자러 가는 것은 아니니 카페인 걱정은 접어두기로 한다.

여행은 자유로워야 한다. 만나지는 상황을 즐겨야지 하지 말아야 할 챙기다 보면 여행이 옹색해진다. 추운 날 컵 하나 더 들고 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표 예매는 늘 나의  몫이니 오히려 미옥이는 고맙단다. 감사히 마신다.





뚜렷히 존재감 있는 표정들이 다 모였다. 변함 없는 얼굴들.

46년이란 긴 여정이었지만 여전히 내 친구들이다. 고향이라는 하나다.

116세 세계 최고령 할머니의 장수 꿀팁이

독이 있는 사람은 멀리 하라는 거였다. 46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독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독이 있을 수도 없다. 진실한 자연과 훼손되지 않는 순수와 바르게 살기를 애쓴 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본성 덕이다.

거짓으로 시끄러운 사람이 없다. 방약무인이거나 인정머리 없었다면 친구로 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쥐고 흔들려는 사람도 뺀질이도 없다. 앞줄과 저 뒷줄에 앉았던 아이들이 제 영혼의 모양과 닮은 아이들을 발견했고 친근하고 자잘한 공감이 쌓이고 쌓여 익은 관계다. 그래도 다 모를 이야기와 허다한 인생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으로 사는가는 줄곧 보아왔다. 삶의 태도를 안다.




모두 밥 걱정 안 하고 자신으로 사는 것도 우리를 기울게 하지 않았다. 참 다행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집안의 큰 걱정이 삶의 열의를 주저앉게 하는 일이 있다. 차가운 현실이 스스로 관계를 망설이거나 다가오는 관계에 뒷걸음질치고 주변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어쩌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선 관계를 끊는 경우도 봤다. 아무도 모르게 덮고 가고 싶지만 관계의 도피는 오히려 의구심을 키워 사실보다 더 큰 짐작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루머가 밀어붙이면 누군가의 인격은 부도가 나고 만다.  

제일 친한 친구는 그를 품어 내느라 열심히 두둔하다가 그것이 한계에 다다르면 어떤 사실은 그냥 내놓아져 버린다. 풍문의 서글픈 주인공은 쭉정이가 되어 더 불쌍한 사람으로 뒷소리가 떠돈다.

친구라는 외로움과 씁쓸함은 얼마나 더 솟구칠 것인가.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인생길 가로막은 장애에 휩쓸린 친구는 없다. 그렇게 길을 잃은 친구는 아직 없다. 다행히.

정말 운이 좋아서였을까..




우리라고 인생에 서툴 때가 왜 없을까

한때 어떤 서운함이 모임을 잠시 흔든 적이 있었다. 무엇을 못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한 것이 해 준 것으로 마음에 남은 문제였다. 잠깐의 마이너스가 있었다. 이깟 것으로 분열될 관계는 아니지만 애쓴 이쪽도 공허하고 불편했다. 입장 바꿔 이해해 봤고 그래도 안 되는 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다. 고향의 뿌리는 깊은 것이니 쉽게 허물어지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가라앉았고 각자 스스로를 되잡고 바로잡으며 서로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더 챙기게 됐다.

사람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릇 마음을 뭉치는 덴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좋은 식사를 하고 라운지에서 와인잔을 기울였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더 높아졌다. 아이들 혼례 준비며 사위, 며느리 자랑, 자식자랑, 남편 이야기까지 섞이면서 배움도 부러움도 논평도 이어졌다.

이순의 귀는 열려 있다.

나온 이야기에 양념을 치면서 달달 볶거나 이야기가 뭉개지지 않도록 살살 버무린다.

인생 풍미가 올라간다. 감칠맛이 난다.

한 마음으로 인생 부침개를 힘차게 던져 뒷면도 노릇노릇 잘 익혀 본다.

별개의 삶이라 이야기가 흩어지기도 한다. 이해 받기도 하고 이해 받지 못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나이의 깊이로 일체감이 깃든다.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의 방식으로 이 순간의 희열을 느꼈다. 신체적인 악조건이 늘어가도 좋은 시절임을 느꼈다.

시고 떫은 약간은 달콤한 삶의 이야기가

와인잔을 채우고 또 채웠다.




이번엔 홍미와 미경이가 자신의 마음을 더 나눈다. 마음부자들이다. 선물 세례다.

브라질에서 온 커피와 프로폴리스 몇 가지가 담긴 종이 가방을 하나씩 안긴다. 홍미의 입국은 캐리어를 항상 무겁게 한다. 이젠 그만 해도 되련만.. 별 거 아니라며 여전히 홍미는 손사래를 친다.

미경인 포장한 선물을 침대에 늘어놓으며 하나씩 고르란다. 그림 그리는 저처럼 예쁘고 고상한 매너 손수건이다. 매너 있는 아이들이 매너 손수건까지, 슬기로운 생활을 더 하잔다. 하기야 슬기로운 생활은 해도 해도 부족하니까.

감사의 답례는 시끄러운 웃음 소리와 받은 선물을 들고 걸친 사진찍기의 호들갑이다.

각자 주인공이다. 지금만큼은 우리가 첫째가 야 한다.

뭐라도 받아줄 수 있고 뭐라도 받아넘길 수 있는 분위기다.




현실엔 우리를 달아난 희망의 묘지 하나쯤 누구나 있다.

인생의 위기는 누구나 있다.

자정이 넘어도 살아온 얘기, 사는 얘기는 끝이 없다.

강요당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 만만찮은 삶의 용량이 가리거나 묻어둘 기한이 끝났다는 듯 각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 실뭉치의 실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그 밤은 그랬다. 홍미도 그랬다.




홍미는 한국 원단을 브라질에 들여다 파는 사업을 17년째 하고 있다.

사업이 풀리지 않아 한국 살림을 정리했을 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브라질에 들어갈 때 시아버지가 주신 20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고등학생 딸과 대학생이던 아들은 한국에 남겨둔 채.

남편과 죽기 살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소처럼 일구어야 했다.

그런데 수입 물량이 가장 많았던 어느 해 브라질 브로커의 농간으로 컨테이너를 몽땅 압류당했다. 사업이 휘청했고 손실액의 회복은 다 됐는지 모르겠단다. 코로나에 경기까지 죽어 이젠 한국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겠나 한다.

초문이다. 참 입이 무거운 친구다. 누구를 통해 들은 적도 없다. 시간이 지나서이기도 하겠지만 홍미는 자신의 일인 듯 아닌 듯 참으로 담담했다.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차라리 객관적 서술에 가까웠다. 감정 없이 사실만 다.

몸부림치며 절망한 시간이 어찌 없었겠나..

한때 돈을 좀 벌어 한국에 작은 아파트도 살 수 있었으니 늘 좋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 한다.

신혼때, 시댁 식구가 많아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끼를 3번씩 차렸고, 브라질에서 제삿상 직접 차려 제사 지내고

그 음식으로 특별한 파티를 하고 있다는 홍미는 순응과 적응이 몸에 밴 사람이다. 강인한 사람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본성이 드러난다. 진가가 드러난다.





우리의 인생 거친 입체다.

그 버거운 공간에서 꼬꾸라지지 않고 살아왔고 자신을 잃지도 잊지도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금세 서로를 알아보고 바로 찾는다.

자신의 삶에 게으른 친구들이 없어서 좋다.

자신의 처지에 오바하지 않는 담백한 친구들이 좋다.

때 타지 않는 친구들이 좋다.

따뜻한 친구들이 좋다.

남은 시간도 우리는 서로에게 벽난로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소명 같은 관계다.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 근처 보문호를 걸었다.

하늘이 파랗다.

미세먼지가 말끔히 걷혔다.

시야가 환하다. 사람들 표정도 환하다.

날씨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초겨울 햇살이 사람들을 감싼다.

빨간색 주황색 단풍잎이, 호수의 윤슬이 산책길을 의욕적이고 사교적으로 만든다. 누구라도 사진을 부탁하고, 사진을 찍어 주고.

부딪치는 웃음이 이 순간을 향한, 자신들을 향한 축배 같다.

애쓰는 인생 오늘만큼은 거나해도 좋다.

뒤따라오는 친구들을 서로 기다린다. 다가오면 발걸음을 맞춰 천천히 걷는다.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은 여유로운 풍요로움이 교차한다.

홍미 동영 미경 미옥 재숙

그 이름 안에 고향이 있고 그 이름 안에서 우리의 삶이 흘러간다.

이 순간처럼 행복하기를...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거는
  친구와 포도주를 마시며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이 오묘한 삶에 대해 악의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가오고 있다니 다가가고 싶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