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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win Sep 28. 2022

삶의 가치 : 직(職)과 업(業)

생명과학도였던 나의 업에 대한 도전과 기록

'일(Work)'이란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으며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가장 많은 부분일 수도 있겠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하루가 드디어 시작된다. 모닝콜이 울리고,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켠다.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 중 많은 시간들을 일터에서 보낸다.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면서.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을 보자, 이들은 모두 '직(職)'을 갖고 있다. 이 '직'이란 직책, 옛날로는 벼슬을 뜻하며 쉽게 말해 하나의 '타이틀'인 것이다. 그럼 '업(業)'이란 무엇일까? '업'은 부여된 과업, 더 간단히는 '일(Work)'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더 실질적인 뜻을 지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을 한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의 '일'은 '업'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여기에 집중을 하고 싶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인생에는 게임처럼 재시작이란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은 시작이 있었으니 언젠간 끝이 정해져 있다. 이처럼 단 한 번뿐이며 유한한 우리의 삶에서,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지 않을까? 문제는 살면서 이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평생 살면서도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 4년간 생명과학분야를 전공한 학생이었다. 전공을 공부하면서도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대학원 학위과정을 준비하며 학부생 시절 약 2년간 연구인턴도 경험해 보고, 실제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 학기를 보내기도 했다.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그저 어떤 학문의 길을 가야겠다고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왜였을까? 흔히 말하는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조부모님 시절부터 으레 이어내려져 오는 그런 집안의 신조 때문이었을까? 부모님께서 못다 이룬 학업에 대한 꿈을 내가 대신 이뤄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도 어린 시절의 내게 투사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의 전공을 결정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는 수동적인 학생에 가까웠던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학교 교육도 능동적인 아이보다는, 말을 잘 따르고, 가르친 대로 잘하는 아이를 만드는, 그리고 그런 아이를 더 선호하는 교육 시스템이지 않나 싶다. 어찌 되었던 나는 당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대학에 진학했고, 그래도 과학 중에서는 가장 좋아했던 생명과학분야를 전공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을 통틀어서, 나는 그동안의 수동적인 학생에서 능동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의 배움에는 전처럼 어떤 수업, 강의를 통해서 얻는 배움도 있지만, 그보다 여러 학과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내 선택에 따른 자유를 기반으로 한, 그리고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생활양식 자체로부터 배우는 것이 가장 크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학의 자유로움 속에서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것은 무언가를 순수하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나'를 뜻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나'라는 것은 그저 어느 순간 확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동안의 내면에서의 숙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숙성을 하는 대상은 '내가 좋아할 수도 있는 잠재적인 무언가'를 말한다. 이 무언가란 사람 외의 어떠한 것도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숙성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생명과학도 좋아하고 패션, 혹은 마케팅도 좋아한다. 둘 다 좋아하는 분야들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삶의 가치를 쏟아부을 정도로 좋아하는 분야이고 대상인가?"라는 질문에 전자는 "좋아하기는 하지"이지만, 후자는 "삶에서 이 분야를 업으로 삼는다면 나는 그래도 일하는 자체가 행복할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좋아하는 것은 그저 한두 가지가 아닐 수 있다. 충분히 여러 개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들의 가치를 진정으로 가늠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계속해서 지켜보며,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는 시점, 수면 위로 무언가가 올라오는 시점까지, 좋아하는 것들에게 계속해서 장작을 넣어주며 불을 지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임계점을 넘어선다거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그 순간이란 개개인의 삶에서 모두 각기 다른 케이스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입학 전 그리고 대학생활중에도 내 앞길은 생명과학도의 길, 아카데미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안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불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불꽃의 이름은 '패션' 그리고 '마케팅'이었고 임계점을 넘어서서 새로운 '나'로 변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던 트리거는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여기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하도록 하겠다. 


어릴 적부터 10년 넘게 달려온 길을 뒤로하고, 나는 단 한 번뿐인 내 삶의 가치를 빛내줄 '업'을 하며 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해서 새로운 '나'를 찾았다. 좋아하는 '업'을 통해서 '직'을 찾는 것이 순리지 않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여러분의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 달리 말하면 하고 싶은 '업'을 하며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 분명 비판적이거나, 좋지 않은 시선으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건 단 한 번이다.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의 인생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용기를 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리고 여러 시도를 해보며 자신만의 트랙을 찾아가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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