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방에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퇴근 후 예약한 숙소를 체크인하려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전 직장에서 입사동기였던 형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맥주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입사할 때 만나던 여자친구와 지금쯤 결혼했으려나 싶었는데 아니란다. 엄청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관계가 삐끗했나 보다. 결혼은 참 쉽지 않구나.
나이가 어느덧 서른 중반을 바라볼 시기인 만큼 연애를 할 때 결혼을 염두하게 된다. 그 형님은 고민이 많았는지 먼저 내게 이야기를 꺼냈다. 주변 동기들은 하나 둘 결혼하고 아기들 사진까지 카톡에 올라오는데 자기는 언제 결혼하나 싶다더라. 지난 여자친구와는 결혼을 앞두고 생각 차이로 다투다가 헤어졌다고 한다. 그때 여자친구는 외모도 이상형에 가까웠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임했던 관계였기에 많은 부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했었단다. 그럼에도 결혼 앞에서 뒷걸음질을 친 것을 보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형님은 나름 연봉을 적지 않게 받는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경제관념 차이 때문에 결혼을 위한 준비를 같이하기에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형님은 경제력은 부족하더라도 생활력이 강한 사람을 원했다. 그러나 그때 만난 여자친구는 그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 형님은 돈도 절약하고 재테크도 열심히 해서 아파트 투자까지 하면서 내 집 마련을 했다. 훗날 결혼 후 가정을 생각해서 지금 더 노력하려 했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현재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소비를 하는데, 자꾸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젊을 때 소비하는 것이 경험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서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결혼까지 생각하기엔 안 맞았다고 하더라.
결국 헤어졌으면 끝난 관계인데 무슨 고민이 더 있었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 그 형님은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는 모양이다. 자상하게 잘 챙겨주는 모습이 현모양처 같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이라더라. 드디어 이 형님이 결혼할 사람을 만났구나 싶었는데 그 형님은 조용히 내게 물었다.
'연애하면서 전 여자친구 생각난 적 없어?'
형님은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현 여자친구의 외모는 충분히 예쁘지만 뭔가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 형님한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만날 수 있냐고 했다. 그 형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잠자리에서 뭔가 아쉬움을 느끼는 거 같아'
본인이 정말 나쁜 건가 싶으면서도 가끔 전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떠오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혼 후 부부관계에 있어 외모의 유효함은 어느 정도 일까? 신혼의 유통기한이 3년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외적인 매력이 사랑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솔직히 정말 중요한 부분인 건 사실이다. 싸우더라도 얼굴 보고 기분이 풀린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부부관계를 통해 억한 감정들을 풀 수도 있다.
지난 여자친구와 만날 때는 지지고 볶고 싸워도 잘 풀었다고 한다. 지금은 크게 다툴 일도 없지만 혼자 답답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본능의 감정과 이성의 판단을 두고 갈등하는 것 같았다
그 형님은 지난 여자친구와의 기억을 종종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다면 이혼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다퉜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적어도 이혼 생각은 안 들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결혼을 위한 조건이 이혼 안 할 사람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 보니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최선의 조건보다는 최악의 조건을 피하는 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상대방의 특별한 매력이 호감이 되었다면, 나이가 들면서 그냥 큰 단점이 없는 무난한 사람을 바라게 된다. 한 번 맺는 관계를 끝까지 지켜내고픈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언가 씁쓸한 현실 앞에 순수한 감정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사랑이란 순수한 감정 위에 조건의 탑을 쌓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필요하다. 그 의지의 원동력은 어떤 조건에서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형님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빨리 결혼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게다가 연고지도 아닌 타지에서 직장을 잡은 그 형님은 기회가 한정적이니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관계의 단점을 타협해야 하는 건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결혼을 빨리 하고 싶은 생각이 확고하다면 스스로의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는 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수용하거나, 외모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거나 말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무언가 긍정적인 부분이 피부에 와닿을 때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거다. 자꾸 단점만 눈에 밟히면 스스로 타협할 수 없다. 아쉬운 점이 자꾸 눈에 밟혀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현재 관계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형님에게 형의 결혼 상대는 지금 여자친구가 아닌 것 같다고 단호히 말했다. 물론 전 여자친구는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절대 시간에 쫓기듯 급하게 연애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결혼을 목표로 당장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아 연애하지 않길 바랐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면서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결혼'을 위한 관계가 아닌 '사람'자체를 보고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결혼은 현실이라며 어느 정도 조건이 괜찮다면 타협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정도 이해한다. 또 결혼에 조건이 붙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같이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법률적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의 수많은 조건 중에 낭만이란 순수한 감정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그 형님은 이별을 결심하는듯 했다. 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는 모른다. 또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그 선택을 결심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 최선의 선택인지는 영원히 증명해 낼 수 없다. 한 TV프로그램에서 MC신동엽이 했던 이야기이다. 인생에 있어 정답은 없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이 정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 선택에 우리는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내가 했던 말들이 그 형님의 선택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그 형님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