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태명은 수박이었다. 조카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꿈에서 커다랗고 선명한 수박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이 태몽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엄마는, 아니 모두가 기다리던 조카였기에 그것이 태몽이어야 했던 엄마는 동생의 눈치를 슬쩍 봤지만 그럴 기미가 없어 보여 실망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 그때에도 조카는 있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실까지 알게 되었을 때 엄마의 꿈은 태몽이자 조카의 태명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조카는 수박을 좋아한다. 수박을 좋아할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태몽이 수박이었다는 것이 아니고 태몽이 수박이었기 때문에 수박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마도 조카와 수박이 함께 놓여있을 때 보인 어른들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커다랗고 무거워 차 없이는 살 엄두도 나지 않고 먹고 난 후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여름 과일에 불과하던 수박에 서사가 생겼으니 우리 가족에게 수박은 남다른 과일이 되어 있었다. 근 10개월을 겨울에도 불러대던 수박이가 수박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라 처음 수박을 먹을 때의 감흥이 어땠겠는가.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꼈을 조카 역시 수박에 대한 좋은 인상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이 조카가 수박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닐까. 혹은 과일을 좋아하는 조카가 수박에 대한 애정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연관 짓고 자주 사다 주어 습관화된 반응은 아닐까.
조카와 달리 나의 태몽은 모과였다고 한다(맛있는 과일 멋진 동물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이 역시 엄마 본인이 꾸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우리 엄마가 그저 과일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나는 살며 인상 깊은 과일 꿈을 꾼 적이 없다. 동물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인간도 동물이니 괴한에 쫓겨 도망치는 꿈을 동물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개가 나타나는 개꿈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자주 꾸는 꿈의 장르나 소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엄마의 경우에는 과일이 그것이고 말이다. 수없이 과일 꿈을 꾸고 혹시나 손주일까 했지만 여러 번 실망하다 우연히 맞은 한 번의 꿈이 사실은 태몽의 실상이 아니었을까? 과일 꿈을 자주 꾸지만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 태몽이 필요한 순간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태몽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문화에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태몽을 알고 있고 쉽게 얘기할 만큼 흔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전 인류의 공통 현상은 아니고 주로 우리 문화에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태몽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그저 미신에 불과하다고 과학은 말한다. 그런데 태몽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깊고 넓게 퍼져있는 것일까? 한반도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2,000여 년간 집단으로 확증편향 또는 집단 히스테리에 시달렸던 것인가? 그저 미신으로 취급하고 넘어가기엔 우리 문화권에서 태몽은 잦은 현상으로 보인다.
아주 옛날에 TV 채널을 돌리다 외국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연애 프로그램 같았는데 상대의 겉모습을 보기 전 여자 집단과 남자 집단이 상대의 옷에 배어있는 체취로 호감도를 결정하는 장면이었다. 사실 너무 오래되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면이 실제 그 인터뷰 장면이었는지 다른 인터뷰 장면에 내가 알고 있는 실험이 뒤섞여 혼동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체취가 이성에 대한 호감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좋은 체취는 중요하다. 샴푸와 바디워시, 향수의 종류가 무수히 많은 이유도 좋은 체취로 사회적 호감도를 높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옷가지 냄새를 맡고 호감도를 결정한 것은 세탁 세제나 향수 등의 잔향이 얼마나 자신의 취향 인가와는 좀 다른 얘기였다. 그들의 호감도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서 발현되는 향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인간은 2세에게 다양한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MHC(주요 조직접합성 복합체)를 가진 사람의 체취에 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고도 한다. 물론 이 내용은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내용을 누구나 찾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확인한 것일 뿐이다. 수박 겉핥기 취미 생활자인 나로서는 정확한 논문 같은 최신 정보를 찾을 정성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체취로 호감도를 결정할 때 자신과 다른 MHC를 가진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준 실험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실험은 좀 놀라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럴 만한 것도 같았다. 효과적으로 인류가 존속하고 번영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일 것이었다.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인간의 기준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애정이 특정한 몇에게 쏠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인간의 취향은 매우 다양하고 사랑은 선택받은 몇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실험이 좀 놀라웠던 점은 내가 내 생각보다 더 멍청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배가 고프고 졸리고 하는 등의 본능에만 지배되는 줄 알았는데 내 본능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내 코와 뇌가 나 몰래 자기들끼리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다니 나, 내 이성과 지각은 대체 무엇인가! 모든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고 이성은 뒤따라 그것을 포장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유의지가 없고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처럼 내 행동의 모든 것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본능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약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 감각기관이 내 이성은 빼놓고 자기들끼리 쿵짝이 맞아있는 건 어쩐지 소외된 기분이다.
아무튼 이 실험에 대한 기억은 태몽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뜬금없이 떠올라 이상한 형태로 결합했다. 평소였다면 태몽이란 것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미신에 비해 미신임을 덜 인지하고 있었던 나에 대해 생각했겠지만, 그날따라 그 실험이 떠올랐고 어쩌면 태몽에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MHC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한다면 임산부의 호르몬 변화에 따른 냄새 역시 내 의식은 모르는 새 무의식이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타인의 임신이 비록 내 DNA를 남기는 일은 아니더라도 인류의 존속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인간은 본능적으로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보호해야 할 존재를 알아챌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생존이 험난하던 원시시대에는 집단이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해야 할 존재를 판단하는 능력이 지금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무의식적으로라도 타인의 임신 여부를 알아채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어쩌다 왜 하필 한국인 한정이 된 것인가 하면 우리에게 우연히 그런 문화가 생겼다고 억지를 부려보고 싶다. 우리에게만 화병이 있듯이 태몽 역시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으로 말이다. 한국인이 다른 민족에 비해 영감이 발달하고 꿈을 통한 예지에 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어떤 상황이 발생했고 그 상황이 당대에 큰 영향을 미쳐 지속되고 강화되었을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삼국시대 어느 영향력 높은 사람이 우연히 생생한 꿈을 꾸었는데 마침 가까운 이가 임신을 했고 그 아이가 장차 자라나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 되었다면 꿈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올 테고 사람들은 비슷한 꿈을 꿀 때마다 그런 인물의 탄생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인물이 그리 쉽게 태어나지는 않겠지만 우리 문화 속에 꿈과 탄생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꿈은 무의식을 처리하는 과정이니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임신 후 변화되는 호르몬의 냄새를 인지할 수 있다면 꿈으로 발현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다 한두 번씩 유명한 사례가 나타나고 그 사례를 바탕으로 지속되고 강화되었는지 모른다.라는 가설을 세워보게 되었지만 나는 과학자가 아니니 실험을 통한 입증 같은 것은 하지 않고 가설의 단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나는 과학을 좋아하고 과학적 사고를 동경하니 내 가설이 내게 그럴듯해 보인다고 해서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 하지 않는다. 일반인에게 과학과 과학적 사고의 의미가 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 해 과학적인 무언가를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가설(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허술하지만)을 세우되 내 생각을 아무 근거 없이 믿지 않는 연습. 과학은 내게 그러한 연습을 시켜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