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문과였고 국문과를 나왔고, 무엇보다 공부와 원수를 지고 살다가 고 3이 되어 급하게 살짝 화해한 탓에 보통의 문과생, 일반적인 국문과 전공자에 비해서도 과학에 대해 훨씬 무지했다.
그래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몸의 신비'였던가 하는 3권짜리 만화책을 닳도록 보았던 기억이 있다. 머리카락이 하루에 얼마나 자라는지 같은 내용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와 척을 지은 와중에도 중 1 과학 시간에는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중1 때 과학 선생님은 아마도 생물을 전공한 분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실험실에서 종종 해부를 했다. 해부 대상은 개구리와 물고기였다. 나는 개구리도 물고기도 해부도 무서워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멀찍이서 해부당하는 개구리와 물고기를 어쩐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해부 시간을 떠올리며 생물 문제집을 펼쳐놓고 푸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때웠다. 그 때문에 생물 문제집은 다른 과목 문제집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2/3 정도나 펼쳐 봤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과 중 1 해부 시간 덕인지 학창 시절 생물은 과학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그나마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반면 화학은 뭘 배우는 건지 좀체 모르겠지만 역시나 중학생 때 매 맞지 않으려고 외워둔 주기율표에 기대 수능까지 봤다. 주기율표를 외었다고는 해도 배열을, 배열의 의미를 외운 것은 아니고 원소의 이름과 영어 약자 표시만을 간신히 외웠었다. 그래서 당최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왜 원소들이 결합해 뭘 잃고 뭘 얻는지 이해도 못 하겠지만, 그럴 것 같아서 답을 고르면 이상하게도 정답이던 경우가 꽤 있는 (당시에는) 지루하고 불가해한 과목이었다. 반면에 물리는 고 3이 되어 수능 준비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게 됐는데 의외로 좋아졌다. 친구들은 어렵다고 싫어했는데 나는 어렵지만 좋았다. 당연하고 진부하게도 물리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문과에서 배우는 물리임에도 물리법칙은 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내 머릿속 물체는 빗면 위에 올려두면 그렇게 움직였고 용수철로 당기면 그렇게 끌려왔는데, 그 움직임에 대한 생각들이 즐거웠던 것과는 무관하게 정답을 비껴갔었다.
어쨌거나 학창 시절 과학은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거나, 나는 좋아하지 않는데 나를 좋아하거나, 나는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보편적인 경우의 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대학을 다니는 중에 생긴 강남 교보문고는 학교에 오가는 길에 자리 잡았다. 복학 후 3학년이 된 나는 졸업반인 친구들을 따라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주 시달렸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강남대로에 있는 영어 회화나 토익 학원을 등록했지만 진짜 졸업반은 아니었기 때문에 심란함과 해이함이 뒤섞여 자주 땡땡이를 쳤다. 그 무렵 강남 교보문고는 넓디넓은 품 같았는데 어느 학기에는 거의 매일을 1교시 수업으로 시작해 남들이 등교할 시간에 하교하여 혼자 교보문고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구석 바닥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읽곤 했었다. 그러다가 박민규 작가의 단편집 카스테라를 읽게 되었고 그것이 내 과학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다. 더 정확히는 카스테라에 수록된 단편 '대왕오징어의 기습' 때문이었다.
대왕오징어가 나를 사로잡았다. 심해에 산다는 대왕오징어, 그러니까 바다 깊은 곳에 뭔가 같으면서 다른 것이 살고 있구나 하는 생경함. 단순한 호기심. 호기심은 자주 귀찮음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이상하게도 단편소설 속 대왕오징어는 궁금해졌다. 지금에야 심해 생물의 사진도 영상도 많이 있지만, 아니 그때로부터 불과 몇 년 후 심해 생물 사진이 유행이던 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책도 다양하지 않았다. 그래도 딱 맞는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바다출판사에서 나온 '심해 생명체의 비밀'이라는 책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 책이 그때 거기 없었더라면 나는 과학을 기웃거리지 않았을 테고 내 생에 경이도 많이 줄었을 거다. '심해 생명체의 비밀'은 처음부터 책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KBS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인데 작고 얇았고 사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한 권을 다 읽기 위해서는 목과 승모근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서점 구석에 한참을 웅크리고 있자 그들은 파업을 하겠다고 아우성쳤고 나는 악덕 업주처럼 내 목과 승모근의 비명을 모른 척했다. 책은 흥미로웠다.
책은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실러캔스가 발견된 1938년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생김 때문에 생선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꺼렸었다. 대가리까지 있는 생선은 더 기겁했는데 중학생 때 그런 밥상을 거부하다 호되게 혼이 났고 그렇지만 어쩐지 그런 생선은 우리 집 밥상에서 더 이상 보기 어려웠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유난을 떨지 않으려고 먼 자리에 앉거나 생선 접시를 겨우 집어 다른 곳에 옮겨놨다. 나는 특히 물고기의 비늘과 지느러미가 징그러웠는데 생선을 먹게 된 다음에도 한동안 지느러미가 입에 들어가거나 젓가락에 닿을까 봐 긴장했다. 실러캔스는 지느러미가 특징이었다. 실러캔스의 지느러미는 원시 어류의 것이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늘도 잘 보였다. 비늘과 지느러미. 나는 사진에 손이라도 닿을까 봐 최대한 조심했고 시선이 사진에 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럼에도 책을 놓지는 않았는데 과학자들이 환희에 차 있었다. 사진으로도 온갖 유난을 떨게 되는 그 물고기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새로운 앎과 발견 앞에서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는 듯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자주 매료된다. 사실 과학보다는 과학자들의 그런 태도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신비하고 재미있는 게 있다고 한껏 들떠 나누고 싶어 하는 모습.
실러캔스는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심해아귀의 모습이었다. 뾰족한 이빨과 코에 막대기를 꽂아놓은 듯한 기괴함에 공포와 혐오를 느꼈다. 그때의 그 공포와 혐오가 어떤 결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더는 무섭지도 혐오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주한다면 모든 물고기에 그러하듯 아마도 여전히 무서워하겠지만 적어도 사진으로 보는 심해 아귀의 모습은 이제 내게 사랑스럽다. 공포와 혐오를 주었던 그 모습이 척박한 곳에 적응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괴해서 더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괴함이 아름다워진 것이다. 기괴함도 아름다움의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심해 생물들로부터 배웠다.
심해에 기괴하게 생긴 생물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개체가 얼마 존재하지 않는 텅 빔 속에서, 먹이를 유인하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생명체가 빛을 낸다. 발광하는 연체동물, 특히 해파리의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요즘은 심해 생물들의 영상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발광하는 해파리의 헤엄은 너무도 우아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보게 된다. 덤보문어도 정말 귀엽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슨하고 한가한 기분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들에겐 몹시 치열한 생존 수단이라고 한다. 산소도 풍부하고 압력도 적당하고 빛도 있는 육지나 얕은 바다 환경과는 달리 척박한 곳을 살아가기 위해 획득한 형질이 어쩌다 보니 인간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게 되었다. 심해 생물들의 기괴함도 아름다움도 인간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겠다고 오랜 시간 진화해 온 것이었다.
어떻게든 생존하는 방향으로 묵묵히 나아가는 것. 그런 종류의 것을 아등바등으로 여기고 꺼리던 20대의 나는 약간은 허무주의적이었고 시니컬했는데 척박하디 척박한 곳에서 생존해내는 심해 생물들을 보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경외가 있었다. 진심과 전력에 대한 존경을 나는 그로부터 배웠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살며 처음으로 아주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심해 생물 탐사에 끼고 싶었다. 심해 생물학자가 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으니까 아주 아주 부자가 되어 연구비를 지원한다면 잠수함을 태워주지 않을까. 귀찮은 짐 덩어리를 데려가며 자신들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후원을 하기엔 돈보다 좋은 것이 없지. 연구비는 언제나 모자란 것일 테니까. 나는 아주 깊고, 아주 어둡고, 아주 압력이 센 곳에서 아마도 드물게 발견하게 될 생명체의 유영을 가만히 보고 싶었다. 심해 작은 생물들의 먹이가 된다는 마린 스노우도 보고 싶었다. 눈이 내리는 바닷속 풍경이라. 그런데 마린 스노우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 부스러진 생물들의 사체가 심해에 이르러서는 눈처럼 작은 알갱이가 되어 내린다고 했다. 생과 사의 순환. 어둡고 적막할 그곳엔 어쩐지 태아 시절의 평안이 있을 것 같았다. 태아로 존재하는 것이 평안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물론 나는 돈을 버는 재주가 없고 그런 생각을 하던 때는 고작 스물셋, 스물넷이었으니 심해 생물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주 조금은 더 가능성 있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제는 둘 다 글렀고 그런 식의 유인 탐사는 위험하기 때문에 무인 잠수정을 개발하는 추세라는 걸 그 무렵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으니 부자가 되어도 생물학자가 되어도 늦은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민간인이 우주여행을 하듯이 깊고 깊은 바닷속을 여행하는 관광 상품이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돌이켜보면 여기서부터 과학에 대한 내 관심이 시작된 것 같다. 환의에 찬 과학자들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동시대에 존재하지만 존재하는 줄 몰랐던 생물들에 대한 생경함과 신비로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아니 과학은 늘 거기 있었고 내가 한발 다가갔다. 카스테라를 읽다가. 교보문고의 향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