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람 Nov 12. 2022

이번은 다르다(1)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법 찾기

별안간 잊고 지냈던 감각이 돌아왔을 때, 기도와 심장이 지나치게 의식되는 그 감각이 끔찍하고 두려워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로 갔고 손은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베란다로 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거칠게 숨 쉬었다. 네 살 아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잠시간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곧 놀이에 집중했다. 자동차를 굴리고 굴착기로 편백나무 조각을 퍼 올렸다. 나는 팔다리를 조금 분주하게 움직였을 뿐 소리를 지르거나 주저앉지 않았으므로 겉보기에 그 공간과 시간은 별스러울 것 없이 평소처럼 흘러가는 듯 보였을 것이다.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손발이 파들거리고 머릿속에서 수십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던 나만 빼면 실제로도 그랬다.


얼마 안 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냥하는 치타처럼 내달렸던 심장이 점차 제 박동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충망을 닫고서 거실로 돌아왔다. 앞자락이 축축해진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의 말에 대꾸도 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수년을 잊고 지내왔던 감각이었다. 한 번 찾아왔으니 두 번, 세 번도 쉽게 찾아올 거라는 공포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티끌 같은 징조에서 그 감각을 길어 올려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뜨릴 것이었다. 이번에는 무뎌지다 결국 사라지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그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고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무서웠다. 좀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평소와 같은 오후였는데. 생각할수록 온몸에 힘이 빠졌고 우울감이 차올랐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이번에야말로 상황을 나아지게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순간만 모면해서는 언제 또 과호흡이 찾아올지, 그 상황을 어떻게 떨쳐야 할지 알 수 없어 계속 불안할 터였고 그런 불안을 평생 안고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생각만 있었을 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전과는 다르게 뭐든 말할 수 있는 친구 한 명과 배우자가 내 옆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 둘을 인터넷에서 만났다. 이전에는 온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문자로만 교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사람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누군가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스갯소리로 시간만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현주 언니를 만나고서 생각했다. 그러면 왜 안 되는가. 이렇게 재밌는데.


현주 언니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인디 가수의 팬카페에서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의 팬카페에서 여러 사람과 떠들다가 언니를 발견했다. 언니랑은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난 사람들이 쓰는 단어에 민감한 편인데 말이 많이 오갈수록 꺼림칙한 표현 한두 가지쯤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은연중에 사람을 성으로, 계급으로 차별하는 단어를 쓴다든지, 누군가를 깔아뭉개는 표현을 별스럽지 않게 쓴다든지. 그런데 언니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불쾌하지 않았다.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시간이 될 때마다 대화했다. 게다가 언니는 몹시 똑똑하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이야기가 흘러흘러 소재에 춘화가 올랐는데 언니가 그에 대해 놀라울 만큼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대학 때 춘화에 대해 조사 발표한 적이 있었다고. 아, 정말이지 언니에게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내가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고(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라고 등 떠민 사람도 언니였다. 그즘에 나는 엄마가 아프다는 이유로 한껏 예민해져 있었고 당연히 집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엄마가 그렇게까지 아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옆에 꼭 붙어 있으면서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언니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할 상황이 아니고, 또 그렇게 했다가는 서로 지쳐 후에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는 아팠으므로, 나는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내 역할을 나눠 한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정말로 그랬다) 면접을 보고 나서 서울에 살고 있던 언니와 만나 아쿠아리움에 갔다가 오리고기를 먹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을 봤는데 어색할 틈도 없이 신나게 떠들며 놀았고 내가 서울로 이사 온 뒤부터는, 마침 집도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 거리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내가 결혼하여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뒤로는 자주 보진 못하였지만 십 년 넘게 매일같이 연락하고 종종 얼굴을 보며 지내는 중이다.


운이 참 좋았다. 대개는 게을러빠진 성격 탓에 연예인을 좋아해도 며칠만 흥분하고 말 뿐 계속해서 카페나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는 일이 거의 없다. 관심도 금방 식어버린다. 수개월 동안(이게 제일 오래간 것이다) 카페나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던 적이 딱 두 번 있는데 한 곳에서 현주 언니를 만났고 다른 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사실 남편은 인터넷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가수의 홈페이지에서는 남편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그 가수가 딱 한 번, 대전의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곳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된 뒤로 매력을 느꼈다. 잘생겼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호흡이 불안정했던 일을 언니와 남편에게 말했다. 둘은 일단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조언했다. 남편은 코로나가 당장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이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고 했다. 이런 일은 주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전에 회사를 관두니 증상이 완화되었던 것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스트레스 상황을 없애보자는 것이었다. 언니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서 최대한 느긋하게, 재미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래도 겁쟁이인 나는 아이를 당장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확진자 수를 보고서 굳이 이렇게 확진자 수가 정점을 찍을 때 아이를 기관에 보내야 하는 것일까, 상황이 좀 더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확진자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