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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Jan 15. 2023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쉴 수 있는 핑계

 고등학교 시절 생리통이 심했다.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서 수업시간 내내 엎드린 채로 배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진통제를 먹고 고통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시간은 속이 터져라 느리게 흘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통이기에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생리통을 느끼는 강도는 저마다 다르고 극심한 생리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같은 여자라도 공감하기 힘들다. 고등학교 3학년 같은 반 교실에서 유일하게 나와 친구 한 명만이 그 고통을 공유했다.

 이번에는 덜 아프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보지만 어김없이 통증은 아랫배에 똬리를 튼다. 언제든 달려들 자세를 취하며. 다행히 성인이 되어 점차 고통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진통제를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정도다.


 엄마는 나와 다르게 생리통을 모르고 살아왔다. 생리통을 이해받지 못했고,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혹시 다른 이들은 이만한 고통쯤은 아무렇지 않게 참아내고 있는 건가? 관심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함을 엄살로 표현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참기 힘들었다. 내장을 휘젓듯 아랫배가 아프고 머리는 핑핑 돌았다. 화장실에서 쓰러질 정도로 생리통이 심했지만, 정신을 차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어 나왔다.


 나는 아이를 낳을 때 겪었던 산통을 생리통에 비유했다. 고등학교 시절 생리통의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다고. 지금은 그 두 시절의 고통을 오롯이 기억하지 못한다. 힘들어했던 모습과 뭔지 모를 억울함만이 남아 있을 뿐 고통의 정도는 몸의 기억에서 흐려졌다. 아이를 낳는 고통은 딱 두 번으로 끝났지만 생리통의 고통은 오래도록 지속되었기에 더 진한 고통으로 배어 있는 것도 같다.

 아이를 낳을 땐 소리 한번 시원하게 지르지 못했다.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도 아닌데 소리 지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숨죽여 생리통과 싸우며 눈물을 훔쳐내던 때처럼 배를 움켜쥐고 산통을 온몸으로 녹여냈다.


 지금도 몸이 아프면 의심부터 든다. 엄살이나 꾀병은 아닌지. 고통을 나타내주는 수치가 있으면 좋으련만. 체온계에만 의지하며 열이 없으면 엄살이라고 단정 짓는다. 우울증이나 불면증도 그렇고 나의 아픔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나약하고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거라 자책했다.


 아이를 낳고부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없다. 집안일은 끝이 없고, 육아는 끝을 알 수 없다. 해야 할 일들을 쌓아놓은 채 맘 편히 쉴 수는 없는 노릇.

 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종일 비가 내려서 그런가? 통증이 배를 조여와서 그런 걸까? 진통제 한 알이면 바로 가라앉을 통증이었지만 먹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을 구실이 필요했나 보다. 소파에 누워 고양이와 함께 잠을 잤다. 사치스러운 낮잠을 두 번이나 자고 일어나니 죄의식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배는 계속 콕콕 쑤셔온다. 여전히 진통제를 먹을 생각은 없다. 죄의식은 들지만 할 일은 쌓여 있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역시나 핑곗거리가 필요하다.

‘난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배가 아프잖아. 이런 날은 좀 쉬어도 돼. 대충 해도 돼.’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르는 변명을 되뇐다.


 지금은 나를 걱정해 주는 아들이 있다. 어떤 고통인지 도통 알 길이 없을 테지만, 마음으로 걱정해 준다.

 “엄마, 내일은 안 아팠으면 좋겠다.”

큰 아들의 한 마디가 쿡쿡 쑤시는 배 위인지 오래된 마음의 상처 위인지 모를 곳에 눈 녹듯 스며든다. 아들이 걱정하겠지만, 앞으로도 진통제를 먹을 생각은 없다.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없다면 생리통을 핑계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젖은 휴지처럼 소파에 들러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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