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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Jan 17. 2023

고단한 삶이라도 계속 살고 싶다

 적지 않은 돈이 계좌로 들어왔다. 동그라미를 몇 번이나 세어봤다. 이런 돈을 오롯이 나의 몫으로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다. 돈은 친오빠가 보낸 것이었다. 그날은 오빠의 생일이었고 말로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미안해 카톡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다. 오빠가 나에게 돈을 보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힘든다는 걸 알고 아이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돈을 보내 주곤 했었다. 그 돈도 가볍게 받을 수 없는 액수였다.


 오빠와 새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생활비를 빼놓고는 돈을 각자 관리한다고 들었다. 오빠는 돈 쓸 데가 없고 여유가 있으니까 주는 거라고 했다. 돈을 가지고 있어야 돈도 들어오는 거라며 비상금으로 갖고 있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염치없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한 살 터울의 오빠와는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같은 방에서 잤고, 어떤 날은 팔짱을 끼고 자기도 했다. 공포가 드리운 밤이었을까?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싶은 밤이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과 욕설이 범람하는 집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춘기 이후로는 데면데면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길에서 만나도 오빠는 모른 척 지나갔다. 그러더니 훌쩍 군대로 떠나버렸다.

 

 오빠가 군대에 가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새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난 그만하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몸은 성장했지만, 두려움에 떨며 흐느끼던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나를 두고 군대로 도망가버린 오빠를 원망했다. 한편으로는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휴가를 나올 때보다 군대로 복귀하는 발걸음이 더 가벼워 보였다. 오빠만의 바늘구멍 같은 숨통을 찾은 것 같았다.

 

 오빠는 지방에 터를 잡았다. 아무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났다. 소유욕이 없고 돈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언제 돈을 벌어 집을 사나 했는데 지금은 오빠가 부럽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


 나는 결혼식에 새아빠를 부르지 않았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길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고통의 기억을 재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는 결혼식에 새아빠를 초대했다.

 오빠는 명절마다 친할머니댁도 챙겼다. 친할머니는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우리를 내쫓으셨고, 작은 아빠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빠만 양자로 들이려 했던 분이다. 그마저도 작은 엄마가 임신을 하자 오빠를 바로 내치셨다. 난 사춘기 이후로는 친할머니댁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오빠는 명절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할머니댁에 갔고, 결혼을 해서도 용돈을 드리거나 선물을 보냈다.


 오빠와 나는 성향이 다른 걸까? 아니면 오빠가 장남이라 나와 다른 걸까? 20대를 고통에 파묻혀 하루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살아온 나와 달리 오빠는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만 어린 시절이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것인가? 억울한 생각이 들 정도로 오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꼿꼿이 살았다. 그런 오빠를 보면 나의 고통이 엄살로 느껴지기도 했고, 오빠에게는 스치듯 가벼운 상처였나 의구심도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 고통도 더 크게 받아들이나 세상을 탓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오빠와 나는 고통이 관통하여 나오는 길이 달랐음을. 고통을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방법이 달랐다. 오빠는 오빠만의 방식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일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어쩌면 맏이의 무게감이 고통에 쓰러져 있을 시간도 허락하지 않아 앞만 보고 달려왔을 수도 있다.


 나는 고통의 칼날을 온몸으로 맞아 쓰러지고 방황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쳐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자유형을 했다가 하늘을 보며 배형을 했다가 유유히 평형을 하기도 하고 숨이 차오르도록 접영을 하기도 한다. 그마저도 안될 땐 잠수를 해서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끝없이 가라앉더라도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언젠가는 수면 위로 올라갈 걸 알기에.

 

 마흔이 넘어 삶에 애착이 생겼다. 지키고 싶은 것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있다. 무지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도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이 세상에 해만 끼치며 무지한 채로 떠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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