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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Mar 16. 2024

하늘색 선글라스의 남자

하늘색 선글라스의 남자 /김미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거리가 한산했다. 손님도 뜸하다가 한 남자가 가게 앞에서 얼쩡거렸다. 검은 가죽점퍼를 입고 밤송이처럼 깡뚱하게 자른 깍뚜기 머리를 애써 숨기듯, 채양이 있는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햇살이 맥을 못 추는 엄동설한에, 더욱이 다저녁에 하늘색 선글라스까지 썼다. 

그 남자의 한 손은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박혀 있고, 또 한 손엔 검정 비닐봉지가 대롱거렸다. 출입문이 따로 없이 앞이 툭 트인 가게 안을 기웃거리던 그 남자가 내가 김밥을 말고 있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치켜들면서 물었다.

“김밥도 해요?”     

내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 남자의 눈이 하늘색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니 손님으로 반색하기엔 좀 거시기했지만 그래도 손님이다.

허리를 구부정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탁자에 얹은 손에 턱을 괴고 만두 한 판, 김밥 두 줄, 어묵 그리고 삶은 달걀 4개를 주문했다.

서둘러 만두를 찌고 김밥을 썰고 있는 내 뒤통수에 대고 어디에 사냐고 물었다. 자녀는 몇 명이며 몇 살이냐, 남편은 뭐 하고 혼자 장사를 하냐? 저의가 의심스럽게 심문하듯 이어졌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전부인 양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금방이라도 태도가 돌변할까 봐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그 남자가 묻는 말에 성의껏 말대꾸를 해 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만두판이 깨끗이 비워지고 타원형 접시 위의 김밥이랑 대꼬챙이에 줄줄이 꿰어있던 어묵과 삶은 달걀 4개가 서서히 그 남자가 벌린 입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남자는 부서진 달걀 껍질만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을 때까지 갈라진 웃음까지 섞어가면서 별 시답잖은 썰렁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면수심의 자식이 도박 빚 때문에 혈육을 살상하는 흉흉한 뉴스로 마음이 뒤숭숭한데, 요즘 세상은 하도 험악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여차하면 칼부림 난다는 살벌한 얘기도 서슴치 않았다

그 말을 듣자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급기야는 먹은 것도 없이 사레들렸다.

목이 간질간질하다가 한번 나오기 시작한 기침이 좀처럼 잡히지 않아 연신 콜록콜록했다. 그러자 장사하는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약국에 가서 '시XX'라고 하는 약을 사서 먹기를 적극 권했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동생 덕을 좀 본다며 감기 기운이 조금 있으면 얼른 동생이 챙겨준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다음에 올 때는 자기가 먹는 약을 얼마간 갖다주겠단다.

선의는 고마운데 불빛에 반짝이는 하늘색 선글라스와 웃을 때 쇳소리가 나는 걸걸한 목소리가 여전히 영 거슬렸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저 사람이 돈을 낼 사람인가, 아닌가?'에만 신경이 쓰였는데 만두 뽑는 기계를 가려둔 커튼 뒤를 가리키며 살림집이 딸렸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범행을 위한 사전 조사를 나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음식값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얼른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 정도였다. 

휑한 공간에 살벌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그 남자의 끝이 없을 것 같은 얘기는 때마침 가게에 들어선 학생들의 수다에 묻혔다. 그때까지 그 남자의 물음에서 벗어날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던 터라 학생들의 왁자한 수다가 무척 반가웠다. 학생들의 주문에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으려니 미적거리던 그 남자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얼마예요?”     

껄렁껄렁한 걸음걸이로 그냥 휑하니 나가 버린다고 해도 적선한 셈 치려고 했는데 잠바 안쪽 호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어서 얼른 잔돈을 거슬러 줬다.

그 남자가 가고 난 후, 역시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어두운 세계의 사람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과 안도의 한숨이 교차했다. 빈 그릇을 치우고 식탁을 닦는데 그 남자가 앉았던 자리 옆 의자 위에 검정 비닐봉지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뭘 싸 가지고 왔다가 놔 두고 간 걸까? 비닐봉지를 한쪽으로 치우려고 할 때 따뜻한 기운과 함께 물컹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봉지를 슬쩍 열어보니 파전이 틱 불어터진 채로 뭉쳐져 있다. 우리 가게에 오기 전에 샀던 모양이다.

얼른 가 줬으면 하는 바람의 이면엔 '다시 오지 않기를······.'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부러 다시 올 구실을 남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그 남자가 가고 난 후 30여 분이 흘렀다. 걸어서 가든, 시내버스를 타고 가든, 한참을 갔을 시간이다. 가게에다 놔 두고 간, 한 주먹 남짓 되는 파전이 뒤늦게 생각났다고 해도 다시 되돌아오기에는 번거로울 수 있는 시간이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주인한테 버림받은 파전 봉다리가 점점 온기를 잃고 천덕꾸러기가 되어갈 때쯤 선글라스 낀 그 남자가 다시 왔다.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파전이라고 했다. 

선글라스 낀 남자는 그 후로도 종종 검정 비닐 봉다리를 들고 가게에 들러 만두를 먹거나 라면을 먹는데 어느 날, 김이 서렸는지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 한쪽 눈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가 야밤에도 선글라스를 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내와 함께 자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당했다고 한다. 아내는 지적 장애와 거동이 어렵고 그는 한쪽 눈을 실명하고 다리를 다쳐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불구가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밥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반찬은 전혀 할 줄 몰라 반찬가게에서 사 먹는 거라고 했다. 밤에도 선글라스를 낀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 본인도 알고 있다면서 애써 웃어보이는 남자.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도 사고의 후유증이었던 거다.      

거부감을 주는 인상과 한쪽 눈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밝게 그리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 남자의 겉모습만 보고 어두운 세계의 사람이 아닐까 지레 짐작하고 혼자 소설을 쓰다시피하여 내심 미안했다. 

부디 지금처럼 열심히 앞으로도 쭉 아내와 서로 의지하며 밝게 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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