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담론의 부재
소설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은 있지만, 소설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진 적은 오랜만이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를 본 후였다. 역시 우연한 기회에 e-book으로 보게 되었지만, 비교적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늦은 밤 고요한 시간에 봐서인지 마지막까지 집중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본 작품은 작가가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쓰게 된 단편 글들이 인기를 얻게 되자 여기에 살을 붙여서 책으로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각에피소드 별로 조금씩 호흡이 끊기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워낙 작가의 역량과 경험이 있어서인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요즘 흔히 회자되듯 '멱살 잡고 캐리 한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베스트작가의 스토리 전개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스토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철이, 민이, 선이라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그 밖에 철이의 아빠이면서 동시에 휴먼매터스라는 휴머노이드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개발자가 나온다. 초반부터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몰입도를 높였다. 마치 마블 액션영화 초반 15분 동안 정신없는 액션신이 등장하듯 말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철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며 중간에 인물들 간의 대화가 삽입된 형태이다.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본인이 인간인 줄 아는 어린 애완용 휴머노이드 (인공지능 로봇) 철이는 아빠와 고양이 세 마리와 여느 행복한 가정에서 지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 외출했다가 알 수 없는 로봇들에게 끌려간다. 어느 수용소에 갇혀진 후 민이와 선이를 만나서 인간과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과의 거대한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하지만 거의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진 최초 개발 휴머노이드인 철이는 여전히 본인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전쟁의 혼란함을 틈타 수용소를 탈출하면서 달마라는 등장인물 (로봇)을 만나게 되고, 정밀검사를 통해 철이가 굉장히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졌으며 자의식까지 생긴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아빠 (박사)와 연락이 되어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나, 이미 현실을 알게 된 철이는 이전과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아빠는 로봇 관련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재판에 서게 되고,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결국 특이점이 넘은 인공지능이 승리하게 되면서 점점 인류는 파멸에 이른다. 한편, 주인공 철이는 전투용 로봇에 의해 머리와 몸이 분리되지만, 개체에 국한되지 않게 자의식을 클라우드와 같은 네트워크에 백업하게 된다. 그리고 아빠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미쳐가는 과정까지 보게 된다. 주인공 철이는 몸을 되찾지만 이미 정신을 백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영혼과 신체가 큰 의미가 없어진 상태이다. 인간과 로봇의 손길이 가급적 닿지 않는 곳에서 상처 입은 동물들을 돌보고 있는 선이를 찾아 나서게 되며, 이들은 인류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철이도 더 이상 의미 없어진 영생을 조용히 마감하면서 소설이 끝나게 된다.
비록 하루 지난 상태에서 머릿속으로만 스토리를 애써 복귀하면서 써놓고 보니, 이야기가 매우 산만해 보이지만 (^^;) 실제 책을 읽다 보면 비교적 체계가 있고 잘 정돈되어 있다. 내가 특히 이 책에서 하이라이트로 여기는 곳은 선이와 달마의가 문답하는 부분이다. 어찌 일반 소설에 등장하기 어려운 굉장히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이 나온다고 했는데, 책 마지막에 작가가 이 부분은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라는 책을 인용했다고 한다. 책을 다 본 상태에서 개인적인 감상평을 적어보자면 조니뎁 출연의 '트랜센던스'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밖에 레이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 그리고 호아킨 주연의 '그녀 (Her)' 등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네오가 등장하는 '매트릭스'도 일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 작품들도 아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 같고, 본 작품을 쓴 김영하 작가 역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듯싶다.
인공지능 (AI), 4차 산업혁명, 코딩, 알파고, 빅데이터... 등 미래를 예측하는데 어김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들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 세계를 뒤엎을만한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한 번쯤 들어보았을 '튜링테스트'가 있다. 이는 1950년대 이미 등장했던 개념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이 질문과 대답을 하면서 인공지능인지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경계점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즉, 대답하는 것을 보고 어디까지 사람인지 기계인지를 맞추느냐 여부로 이를 통과한다면 기계도 어느 정도 자의식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외부에서 이들이 쓴 글이나 말로써는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자의식'이나 '독립된 개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기술이 진보할수록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근원적인 질문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요즘 각종 매체에서 많이 등장하는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는 말하길,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주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일시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라는 것이다.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우주는 무생물 상태의 원자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기회에 어찌하다 잠깐 '생명'이라는 형태로 찰나의 순간을 보낸 후, 다시 원래의 무생물의 원자로 흩어진다. 전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찰나와 같은 인생 역시 수없이 반복된 원자와 분자의 일시적인 배열과 해체의 연장선상서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이 든다. 우주적인 자아가 생명의 형태로 뭉쳤다 흩어졌다 하는 것과, 네트워크에 백업된 인공지능이 로봇 몸통을 갈아 끼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한편으로는 굳이 불교의 억겁의 환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실에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 우리네 다사다난한 인생사가 태평양 바다에서 일렁이는 작은 물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허무함이 들기도 한다. 다시 한번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과연 어디로 왜 흘러가는지에 대해 반성해 본다. 바쁜 현실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면 가끔 가장 중요한 이슈인 '왜'라는 것에 대해 간과하기 쉬운 것 같다. 혹자는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는 하지만, 꼭 정답을 맞히는 게 목표가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필요하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 역시 바쁜 일상에서 이런 방향성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뺏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미국/프랑스 교육을 모두 경험해 본 조승연 작가가 세 나라의 교육에 관해 한마디로 정리한 것을 본 적 있다. 한국은 '무엇(what)'을 배우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미국은 '어떻게(how)'에 더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코딩을 예로 들면 우리는 원하는 정답을 보는 반면 미국은 어떤 식으로 코딩을 짰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에 반해 프랑스에서는 '왜(why)'가 교육의 주된 관심사라고 한다. 파리 길거리 카페에서 몰리에르의 철학적 견해에 관해 학생들이 논쟁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렇게 상이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른이 되어 나라를 이끈다. 우리나라도 이제 경제대국으로서 패스트팔로워 (fast follower) 전략을 갖는 동시, 퍼스트무버 (first mover)의 역할도 겸비해야 하는 시점이 온 듯하다. 사람들이 How와 Why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