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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속의 두더지 Sep 27. 2022

그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이제는 친정집이라고 부르는 엄마 아빠 집 서재엔 내가 한때 열심히 사(모아) 놓은 책들도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 꽤나 열심히 읽은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책도 있고 심지어 있는지도 몰라 또다시 산 책도 있다.


종종 엄마 집에 가면 서재에 들어가 책들을 몇 권씩 집어 오곤 한다. 이번 어버이날에 내가 들고 온 책 중 하나는 <그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였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홍보용 메모장만큼 작고 얇은 이 책은 아마도 하루키 에세이에 부록으로 같이 딸려 온 게 아닐까 싶은데, 신기하게도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는 어딨는지 보이지도 않고 읽었던 것 같긴 한데 내용도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하루키 에세이가 아니라 부록 같은 이 책을 갖고 집으로 왔다. 아마도 서율이와의 첫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이기도 했을 터.


나는 서율이를 낳고 나서부터 어릴 적 자란 춘천을 너무나 그리워했다. 향수병처럼 그리움이 커져 서율이를 재워놓고는 오늘은 중학교를 가볼까 하고는 옛 우리집에서부터 학교까지 로드뷰를 보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춘천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아빠가 데리고 갔던 식당이 여전히 있나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신랑의 휴가 일정이 확정되고 나는 완벽한 여행을 위해서 검색하고 지도 보고 동선 확인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춘천은 사실 웬만한 거리는 2-30분이면 충분한데도 나는 그 준비 자체가 너무나 즐거워서 매일 밤마다 검색을 하며 설렜다.


어릴 적 갔던 콧구멍다리 근처 야외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 그리고 초여름에 가족들이랑 자주 갔던 구봉산 야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셔야지. 저녁으론 친구들이랑 야식으로 먹곤 했던 김피탕이랑 맥주도 마실 거야. 다음날엔 요즘 인스타에서 핫한 목장에 가서 서율이 사진 좀 찍어주고 어릴 때 갔던 부안막국수 평상에 앉아 막국수 먹어야지. 그리고 학교 근처도 다시 가봐야겠다. 아 맞다 그리고 팔호광장 왕짱구 만두도 먹어야지. 레트로가 유행이니 육림랜드도 가볼까.


하여 내 기준 완벽에 가까운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한 여행을 하였습니다.


로 끝나면 좋겠지만 아이와의 첫 여행은 ‘내가 왜 왔을까’와 ‘그래도 오니 좋다’의 반복이었다. 심지어 코로나 시국이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났다. (그 중 최고 통제불능은 내 아들이었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 곳곳마다 "여기 청소년 수련원말야 나 중학교 때 수련회로 왔었어."" 여기가 내가 다니던 집현전이란 학원 있었던 데야." "여기 우체국이 아직도 있네. 여긴 길이 다 새로 났다. 하나도 모르겠어." "춘천 처음 이사 왔을 때 건물이 너무 낮아서 나 여기서 못 산다고 울었대." 등등 크게 호응 없는 남편에게 조잘조잘 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춘천에 늘 오고 싶어 했던 이유를.


서울 촌놈이란 예능 프로에서 이범수 배우가 옛집의 담벼락을 잡고 “이 집에서 엄마 아빠가 나오실 것 같아요.”하며 “엄마 아빠 저 왔어요.” 했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나 역시 어렸던 나와 지금의 나만큼 젊었던 내 부모가 여전히 춘천에 있을 것만 같아서. 그 시절의 우리가 춘천 곳곳에 여전히 머물고만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도 춘천을 그리워했던 것만 같다. 그리고 문득 서율이랑 처음 여행 온 오늘의 춘천도 먼 훗날 매우 그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거화유재. 봄은 갔지만 꽃은 여전하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나의 유년 시절은 지나버렸지만 내게 춘천은 늘 여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곳은 봄, 춘천은 내게 늘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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