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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l 02. 2024

39. 하.. 다 털렸네?

콜롬비아 | 인생그래프,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서 1

포파얀 - 이피알레스 구간은 게릴라가 자주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에이, 사람이 얼마나 재수가 없으려고.. 설마 게릴라를 만나겠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재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재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게릴라를 그냥 무시할 순 없었다.

우리나라엔 없는 존재니까.


인간은 낯선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렇다고 마땅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이 다양한 것도 아니었다.

이피알레스로 가는 여러 버스 회사 중 그나마 회사 규모가 크고, 가격이 비싼 회사를 고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항상 최저가를 추구하고 가성비를 추구했던 이번 여행에서 몇 안 되는 가성비와 최저가를 포기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걸 이때의 난 아직 알지 못했다.)


남미는 넓은 대륙과 험난한 지형, 자연환경 등 다양한 요소로 인해 철도가 많이 발달되어있지 못하다.

이동수단은 대부분은 버스이며, 이동거리가 7시간 정도면 가까운 거리였다.

자연스럽게 야간 버스도 많다.


출발 시간은 밤 11시 57분. 자정이 조금 안된 시간.

이동시간은 8시간 정도였지만, 험난한 지형과 도로 환경 상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를 잘 못 봤기에,

10시간 정도 버스를 탄다 생각하고 준비했다.


나의 옷가지나 잡다한 물건들이 든 커다란 배낭을 버스 트렁크에 싣고,

귀중품을 모아 담아둔 작은 배낭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밤에 조금이라도 잠을 자 둬야 다음날 이동하는데 지장이 덜 생긴다.

그것을 이미 수차례 경험으로 체험했기에, 버스에 타자마자 들고 다니던 담요로 몸을 덮고 눈을 감았다.

물론 귀중품이 든 나의 배낭을 다리 사이에 걸고 담요로 가리는 것도 잊지 않고.


눈을 감기 전

어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여긴 어디지?'

  '분명 나는 야간버스를 타고 바로 잤는데..'

  '왜 버스 안이 아니라 여기 누워있는 걸까?'

몸을 일으켜보니 발 언저리에 식판이 보인다.

밥이 있다.

평소 눈치가 빨랐던 나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눈치를 챘다.


  '아 꿈이구나^^'

그렇게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


...

...

눈을 떴다.

아까 그 낯선 천장이 또 보인다.


  '어, 아까 그 천장이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보니 여전히 발 언저리에 식판이 보인다.

또 밥이 있다.

그런데 아까랑 메뉴가 다르다.

평소 눈치가 빨랐던 나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눈치를 챘다.


  '아 아직 꿈이구나^^'

그렇게 나는 또다시 잠에 들었다.


...

...

...

눈을 떴다.

아까 그 낯선 천장이 또또 보인다.

이쯤 되니 뭔가 수상하다.


몸을 일으켜 세워 보니 여전히 발 언저리에 식판이 보인다.

또 아까랑 다른 메뉴의 밥이 있다.


이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팔에 링거를 꼽은 채.

아무래도 병원인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이라고 이땐 생각했었다.) 전만 해도 버스에 타고 있던 내가 병원에 누워있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없이 두근대는 심장이 나를 지금 여기가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의사던 간호사던 누구든지 만나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했다.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를 신고 병실을 나가려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정신은 내 것인데, 몸은 내 것이 아닌 느낌.

갓 태어난 기린 새끼가 자기 몸을 가눌 때 이런 느낌일까?


링거가 걸린 거치대를 지팡이 삼아 비틀비틀 병실 밖을 나왔다.




다행히 의사는 금방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의사에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버스에서 내가 잠든 사이에 누가 나에게 약을 먹인 듯했다.

그렇게 나는 의식을 잃었고,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가 일어나지 않아 병원으로 왔다는 것이다.

(버스 회사에서 나를 병원까지 데리고 온 건지, 구급차를 타고 온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나는 꼬박 이틀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말로는 그 약이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단다.


그제야 눈을 뜨고 난 이후의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약기운에 취해 현실과 꿈을 혼동하여 깼다 잠들었다를 반복했고,

일어나서 걸을 때 비틀거렸던 것이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윗 옷을 올리고 몸을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내 몸에 구멍이 난 곳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행히 장기를 털리진 않았다. 무서워...ㄷㄷ)


정말 다시 이렇게 눈 뜬 게 다행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며 신기하다 느꼈던 건

당시 의사는 영어를 쓸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 또한 의사의 스페인어를 온전히 알아들을 수준의 실력이 아니었음에도 대화가 통했다는 것.

(역시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의사와 이야기하며 전후 사정을 듣다 보니 처음 눈을 뜨고 의사를 찾아 병실을 나섰을 때보다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의식이 돌아온 건 아무래도 몸의 약기운이 어느 정도 빠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전후 사정을 듣고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일단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 위에는 나의 귀중품이 든 작은 배낭이 내가 누워있던 곳 바로 옆에 눕혀져 있다.

기분이 싸했다.

분명히 내 가방인데, 어째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가방을 열었다.

그 배낭에는 여권과 지갑, 현금, 신용카드, 카메라, 렌즈, 노트북, 외장하드, 액션캠, 각종 충전기 등이 들어있다.

아니, 들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가방에는 여권과 현금이 털린 지갑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누가 어떠한 의도로 나에게 약을 먹였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혹시나 게릴라를 만날까 걱정했던 나는 다행히 게릴라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강도를 만났을 뿐.

그것도, 아주 질 나쁜.



하.. 다 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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