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파혼을 맞았던 직전 연애에서 나는 가슴을 내리치고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결말에 다다르게 되어서는 내 안의 폭풍은 숨으로 내쉬어도 그치지않게 되었고 상대의 폭풍은 나에게 곧장 마주하여 패인 홈들을 콕콕 만들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심플하기 그지없는 관계종말의 힌트였다. 타인에게 보기좋게 설명할 그런 사람임은 분명했고, 막연한 호기심과 무지로부터 오는 판단력 미스의 범벅인 결말.
노후가 보장된 부모님과 지방도시의 내가 바라본 서울사람, 번듯한 직장에 건전한 취미. 겉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나에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니 그 말을 곧이 믿고 싶었던 것 같고. 결혼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본질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최소한 좋아죽겠다는 감정이라도 가졌어야 했는데 지나고보니 모든 상황이 부정적이기만 했던 것 같다. 관계가 끝난 후에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와 같은 의문은 안 들었던 걸 보면 완벽히 사랑은 아니었다. 서로간의 협약 같던 관계가 끝나고 보니 '우리 관계에서 수익이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이 되지 않았나보다'하는 결론이 내려진 걸 보면.
그리고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를 현재의 연애를 떠올린다. 연애를 끊임없이 해온 나로서는 처음으로 5개월 가량의 공백기를 가지며 내 인생 연애사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깊은 바닥을 찍고 왔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생각과 자기반성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혼자로서 어깨펴고 일어서려는데 지금의 연애가 싹이 튼 것이다. 나이 때문일지, 생각의 결과일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자유로웠다.
우리는 틈만 나면 대화를 했고, 서로의 기억을 나눴고, 공감했고, 또 대화를 했다. 때때로 삐걱거리던 전과 달리. 그리고 그가 하는 생각과 말은 나에게 모두 정답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부감도 들었었다. 말만 잘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할 정도로 너무 맞는 말만 해대니까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눈빛으로, 행동으로,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은 곧 나에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 표현들이 결코 꾸미거나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내 장벽을 무너뜨렸다. 나에게 잘 보이려 하는 모습들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임을 알았을 때 더 안도되었다. 그것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직전 연애로 돌아가보면 제법 고상한 연애를 했다. 서울 사람답게 그는 자연보다는 도시스러운 사람이었기에 식당만 보더라도 무너져내리는 간판에 군침을 다시는 나와는 달리 깔끔한 모던 맛집을 선호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시부모님이었던 분들을 만나뵙기 위해 종종 서울로 갔을 때는 늘 고급, 호텔과 같은 도시의 것들과 함께였다. 그에 맞게 입어야했고, 소비해야했다. 주고받는 선물도 고급이어야 했고 부담을 느껴야했다. 당시에도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게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미래에 대한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한 걸까.)
많은 대화 끝에 새로운 연애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의 방향성을 찾은 기분이었다. '이거지!' 유난히도 푸르던 올해 봄, 그 푸르른 광경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내가 하는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을 만났다. 해주고 또 해주고도 더 못해줘 아쉬워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면서도 매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나는 연애 초반의 상대를 믿지 못한다. 어떻게든 본성에 따라 변할 수 있을테고 그런 모습에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 사람은 믿어보고 싶었고 이 사람 또한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어졌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 연애가 실패라는 결과를 낳는대도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을 만난 것만 해도 충분히 기적이고 행운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나같은 사람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 좋다. 계속해서 과거와 비교하게 되는 내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지만 지금 이 상황에 더 크게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과거가 고마워지기도 한다.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