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시작한 직장인 도예반의 정식 커리큘럼이 끝나고 이제 나는 물레가 아닌 핸드빌딩, 손으로 만드는 것은 웬만하면 다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접시도 필요한 디자인으로 간단히 만들어도 보고, 어렵지만 3단 찬합도 만들어 보고, 다육이 화분도 만들어 봤다. 정식 커리큘럼을 끝내긴 했어도 아직 초보자인 내 작품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나만의 분위기가 나는 작품들이었다.
티스푼, 우리집강아지 오브제, 다육화분
엄청난 공을 들여 만든 3단 찬합
진짜 이것저것 엄청 만들어보다가 11월 공방 회원전을 위한 작품을 만들기 전, 약 한 달 반가량의 시간이 붕떠버렸다. 그때 생각난 것 하나. 우리나라의 전통잔인 계영배였다.
계영배는 술잔의 일종인데, 술을 일정 수준 이상 따르면 잔에서 술이 모두 빠져나가버린다. 과욕을 주의하고 절제를 가까이하라는 의미의 술잔인 것이다.
계영배를 손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선생님도 "왜 굳이 계영배를...?"이라는 반응을 보이셨다. 하지만 내가 노트에 그려온 디자인과 계획을 보시고는 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계영배의 원리는 화장실의 변기 구조와 비슷하다. 그래서 구멍이 있는 큰 관, 작은 관을 만든 후 컵에 붙여주면 이론상으로는 성공이다. 코일링으로 잔과 잔 안쪽에 붙일 관, 술이 빠져나와서 모이는 부분을 만들어줬다. (남은 흙으로는 장난 삼아 그릇을 만들었다.)
왼) 계영배 원리 / 오) 코일링으로 만든 계영배 부품(?)과 다른 기물
첫날에는 모양만 대강 잡아주면 된다. 흙이 아직 질어서 모양을 깎아내거나, 정교한 작업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빨리 어찌나 물레를 배우고 싶은지...ㅎ (물레는 내년 여름쯤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날, 이제 코일링으로 쌓아준 흙을 사정없이 깎아준다. 작은 사이즈라도 2개가 한쌍이면 최대한 비슷한 두께, 모양, 높이가 되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서 오래 걸리고, 까다롭다. 아마 성형만 이틀 넘게 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모양이 나오고, 그만 다듬어도 되겠다 싶으면 술잔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가운데에 파이프(?)와 덮개(?)를 붙여 모양을 다듬어준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왜 더 예쁜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된다ㅎㅎ
정형과정이 끝난 계영배, 계영배과 같이 만든 그릇들도 다듬고 백토를 발라놨다.
모양을 다듬는 정형과정이 끝났다면 잔에 어떤 메시지나 그림을 넣을지 생각해야 한다. 그림을 그릴 때가 되니 벌써 봄 이야기가 나오는 때가 되어버렸다. 나는 흰색 꽃을 그려보기로 했다. 내가 사용한 흙은 분청토라서 전기가마에 들어가면 갈색으로 나오기 때문에 흰색과 대비를 이루면 좋을 것 같았다.
정형이 끝난 후 백토를 발라 놓고 다음 시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다. 작은 술잔 하나 조각하는 데 4시간씩 걸렸다... 1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터 다신 조각을 하지 않겠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는지...ㅎ 하지만 또 다음 기물에 조각을 하고 있을 내가 너무 빤했다. 항상 다짐하고, 후회하고, 또 다짐하고ㅎㅎ
조각까지 끝낸 계영배
조각이 끝난 계영배 밑에 내 시그니쳐 도장을 찍었다. 사실 이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 내 이름이 들어간 내 작품이라는 애정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다. 기물은 가마에 들어가기 전 건조를 시켜둔다.
완성된 계영배
계영배완성! 흰색 꽃과 어울리는 소박하고 약간은 투박한 형태의 계영배가 완성되었다. 실제로 보면 소주잔보다 조금 큰 사이즈라 잔이 귀여웠다.
물론 계영배의 가장 큰 특징인 물 빠짐도 완벽하게 잘 되고 있었다. 페어로 만들었던 2개 다 성공적으로 물이 잘 빠져나오고, 잘 담겼다.
얼마나 뿌듯하던지 가족들한테도 보여주고, 친구들한테도 보여주고, 인스타에도 올려서 자랑했다.
친구들도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대박"이라며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공들인 시간과 정형과 조각을 위해 희생당한 시력을 생각하면 두 번은 못할 것 같다. 이제 내가 쓸 계영배 1쌍은 만들었으니 이제부터 돈 받고 파는 거 아니면 계영배는 안 만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