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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엄마 Aug 31. 2023

봉숭아 물들이기

첫눈이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감자네 가족이 숲으로 소풍을 갔어요.

커다란 나무 위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맴맴 매미 울음소리도 들렸죠.


그런데 나무 앞에 이쁜 꽃밭이 보이네요.

"어, 엄마 이게 무슨 꽃이에요?"

감자가 엄마에게 물었어요.

"감자야, 그건 봉숭아 꽃이야.

엄마 어릴 때는 여름이 되면 봉숭아 꽃으로 손가락에 물을 들이고는 했었지.

감자도 오늘 저녁에 봉숭아물들여볼래?"

"네! 좋아요!"

감자와 엄마는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필요한 만큼 뜯어왔어요.


저녁이 됐어요.

엄마는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에 명반을 조금 뿌리고 잘게 찧었어요.

그리고 흐물흐물해진 봉숭아 꽃을 동글동글하게 만들어 콩알보다 작은 감자 손톱 위에 올려주었어요.

"감자야. 이제 엄마가 랩으로 돌돌 말아서 실로 묶어줄 건데. 자고 일어나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을 거야.

내일 이쁘게 물든 손톱 보려면 얼른 자야겠지?"

"네 엄마! 얼른 아침이 돼서 주황색으로 물든 손톱 보고 싶어요!"


감자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어요.  

"감자야.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물 잘 들어서 감자의 사랑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감자는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어요.


주황색으로 손톱이 물든다는 건 어떤 모양일까요.

궁금한 게 많아진 감자는 주황빛으로 물든 사랑을 그려보았어요.

그리고 입꼬리가 볼까지 올라가게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답니다.




저에게 있어서'여름 방학의 추억' 하면 여행보다는 봉숭아물들이기가 먼저 생각납니다. 봉숭아물들이기는 매년 하는 김장 맛이 집집마다 다르듯이 저마다 다른 농도의 색을 보여주고는 했었죠. 봉숭아물을 들이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자다가 손가락에 감은 랩이 떨어질까 긴장하던 마음과, 다음날 어떤 색으로 물들지 설렘을 안고 잠에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개학날이 되면 친구들과 저마다 주황색으로 물든 손가락을 내보이며 뽐내고는 했었죠. 누구 손가락이 제일 진하게 물들었는지 확인하면서요.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데.' 손가락을 뽐내던 친구 중 한 명이 봉숭아물의 속설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자신의 손톱 위에 봉숭아물이 오래 남아 있기를 염원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 또한 그랬어요. 첫사랑은 없었지만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간절한 염원이 통했던 걸까요. 손톱 끝에 반달 모양으로 옅은 주황빛이 남았을 때였어요. 첫눈을 보게 됐죠. 하지만 첫사랑이 이루어졌다던지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으니 첫사랑이 이루지기엔 이른 시기였죠.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8월 말.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일 때가 됐는데 아직도 덥구나 하던 찰나였어요. 문득 매년 여름 손가락을 붉게 물들였던 봉숭아가 생각났어요.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을 감자와 공유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봉숭아꽃 찾기에 나섰답니다. 아파트 화단에는 봄에 개화하는 철쭉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공원에도 가보고 좀 더 안 쪽에 있는 숲 속에도 가보았지요.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봉숭아꽃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잘 다듬어진 신도시의 화단 위에는 야생화가 자랄 땅이 없었죠. 엄마가 그토록 재미있게 말해주는 봉숭아물들이기가 뭔지 기대했던 감자의 실망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해 보자며 단념하고 있었죠.


지난 주말 감자네 가족은 용인에 있는 계곡으로 소풍을 다녀왔어요. 그리고 자연 속의 규칙이 어우러져 있는 그곳에서 봉숭아꽃을 만나게 됐죠. "감자야! 이게 봉숭아꽃이야! 이 꽃을 여기서 만나네!" 감자와 저는 신이 나서 꽃잎과 이파리를 따왔답니다.(물론 필요한 만큼만 조금 가져왔답니다.)


저녁이 되고, 샤워 중인 감자와 남편을 기다리며 봉숭아물들이기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명반을 준비하지 못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인터넷에서 소금을 넣어도 된다는 글을 보게 됐죠. 다행이다 하면서 굵은소금을 뿌렸어요. 그런데 의욕이 너무 과했던 걸까요? 손가락에 랩을 감고 몇 분이 지나자 감자는 손톱이 따갑다고 했어요. '그럴 리가 없어 감자야. 지금 풀면 안 돼. 밤새 해야지 이쁘게 물드는 거야.'


랩을 풀어헤치려는 감자를 다독여봤어요. 붉게 물든 손톱을 보며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설렘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감정을 감자와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감자가 계속 따갑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결국 모든 랩을 풀었답니다. 아쉬운 마음에 남편을 붙잡고 랩을 칭칭 감았어요. 얼떨결의 남편의 새끼손가락만 곱게 물들어버렸죠.


'감자야, 지금 안 해도 돼. 나중에 우리 감자 초등학생되면 이쁘게 다시 물들여보자. 매년 여름은 다시 찾아오니 괜찮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3년 뒤를 기약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감자도 다가오는 여름방학 봉숭아물들이기를 기대하게 될까요? 그리고 또 몇 년 뒤가 되면 감자 또한 첫눈이 올 때를 기다리게 되겠죠. 그럼 저는 감자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한 봉숭아꽃잎을 찾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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