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들깨
우리는 들깨 수확보다
순전히 멧돼지로부터 고구마를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구마밭 둘레로 들깨를 심는다.
멧돼지가 들깨 향을 싫어한다네?
작년에는 들깨 덕분인지 아래 블루베리 밭에 24시간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 덕분인지 몰라도 멧돼지 출몰은 없었다. 올해는 서둘러 들깨 씨를 뿌렸다.
옆집 할머니께서는 좀 이르다고 말씀하셨지만 내 딴에는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밀어붙인 것이다.
경험을 존중했어야 했다.
일찍 심은 들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만 쑥쑥 커갔다.
올라오는 순을 끊어줘야 한다는데 잎이 야들하고 싱싱한 잎사귀 어디를 끊어 줘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
시기는 놓치고 소심하게 깻잎 얼마는 따서 깻잎 반찬을 만들기는 했다.
손바닥만 한 깻잎을 따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광합성 작용을 해서 알찬 열매를 맺히게 할 건데 넓적한 잎을 따 버리면 알곡이 없는 거 아니야?
아니야. 순을 끊어 줘야 한다 했으니 오히려 더 알찬 알곡이 맺힐 거야!' 하면서 말이다.
작년까지는 들깨 수확에 별 관심이 없어 밭에 흘러내리든 말든 크게 신경을 안 썼다.
베어낸 들깨대에서 떨어져 한데 모인 것만 손질하면 한 되 정도 된다.
한 되 정도 된 양을 가지고 방앗간에 들고 가 기름 짜기도 거피를 내기도 참 어중간하다.
방앗간 들이는 삯으로 차라리 사서 먹는 것이 더 싸게 치니까
시커먼 들깨 알 이리저리 굴리다 하루는 믹서기에 갈아 둥둥 뜨는 까만 껍질분은 버리고 가라앉는 하얀 분을 무청 시래깃국에 넣어 끓어보았다.
구수한 맛이 참 좋았다.
이웃에게 그리해먹어도 좋긴 한데 손질이 너무 번거롭더라고 들깨를 심자니 손질하기 귀찮고 안 심자니 멧돼지가 걱정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들은 이웃께서 흰 들깨를 심어 보라고 흰 들 깨 씨앗을 주셨다.
흰 들깨는 따로 거피를 내지 않고 그냥 갈아 겉껍질을 걸러내지 않아도 부드럽다고 하셨다.
그래서 더 서둘러 씨앗을 뿌렸는지 모른다.
들깨 꽃이 필 무렵 태풍이 지나갔다
키가 큰 들깨는 태풍에 못 이기고 한쪽으로 모두 쓰러져 버렸다.
태풍이 지난 다음날 남편과 아들의 손까지 빌려 쓰러진 들깨대를 조심해서 세우는 작업을 했다.
지나다니는 동네분들 다들 한 마디씩 거든다.
"아이고. 들깨를 너무 이르게 심어서 키가 너무 컸뿟네"
"쓰러진 들깨를 그리 세우면 오히려 뿌리가 다쳐 말라 삘 건데?"
"쓰러진 채로 놔둬도 지가 알아서 해를 보고 고개를 쳐드니 냅두는것이 좋을낀데~"
혼란스럽다 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귀가 얇은 남편은 경험자 말을 존중하자고 고정대로 쓸 고춧대를 땅에다 박다 말았다.
결국 반만 세우고 말았다.
가을볕에 곡식이 여문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들깨나 참깨를 베어 마르게 하는 걸 '들깨를 찐다' 또는 '깨를 찐다'라고 표현한다.
들깨를 찐다?
고구마를 찐다, 감자를 찐다라고 하는 말은 불을 사용해 익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들깨나 참깨는 볶아서 기름을 짜거나 양념으로 쓰는 알곡인데
감자나 고구마처럼 찌는 건 아닐 것인데 찐다고?
알곡이 들어있는 들깨대나 깻대에 수분이 있는 채로는 알곡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가을볕과 살랑이는 바람에 베어 놓은 들깨대는 수분이 날아가고 건조가 된다.
알곡을 단단히 싸고 있는 겉껍질도 건조되면서 힘이 빠지고 느슨해진다. 그러면서 알곡은 더욱더 여물어지고 숙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결국 직화는 아니지만 더욱 여문 알곡을 얻기 위해 가을볕에 찌는 행위인 것이다. '들깨를 찐다'는 그 말속에는 지혜와 과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며칠간 가을볕에 들깨를 쪘다.
하늘이 높고 푸른 화창한 휴일 들깨 타작을 했다.
수확한 흰 들깨로 조랭이떡 들깨탕,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토란탕, 무청 시래깃국에도 들깨가루를 듬뿍.
정말 정말 구수하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