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덕분에 유년기를 경험한다.
손주는 로봇을 아주 좋아한다.
손주는 일반적인 남자아이의 성장 발달 단계와 엇비슷하게 자동차, 공룡, 로봇, 레고 만들기, 컴퓨터 게임 등 집안에서 하는 실내 놀이를 한다.
손주는 초등 1학년. 유치원 때는 반 조립 상태의 로봇을 리스트로 꼽아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하더니 순식간에 블록 조립 로봇으로 그 영역이 확장됐다.
블록 로봇의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뭐라 종알종알 대는 생소하고 긴 로봇의 이름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듣고도 뒤돌아서면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아침밥을 먹고 등교를 하기 위해 아침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제 아빠의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오는 손주의 가방은 모두 세 개.
책가방, 학원 가방, 로봇 가방. 그중 하나에는 요즘 손주가 가장 좋아하는 로봇이 들어있는 에코백이 있다.
손주 녀석이 입고 온 롱 패딩을 벗어 놓은 한 짐과 가방 세 개를 부려 놓은 또 한 짐. 거실 한쪽은 순식간에 손주 녀석의 짐으로 수북하다.
문제는 에코백에 담긴 로봇이다. 당연히 손주가 하교를 하고 귀가해야만 에코백에서 나올 수 있는 로봇.
한 달전쯤 호주에 사는 이모가 휴가차 귀국해 선물로 사 준 00 로봇이 요즘 손주가 제일 좋아하고 매일 갖고 다니는 로봇이다. 블록 피스가 천 개가 훨씬 넘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로봇을 혼자 힘으로 나흘에 걸쳐 조립했다고 의기양양 자랑을 해 댄 블록 로봇.
손주도 여타 학생들처럼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휴식의 달콤함을 알아버렸다.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4교시를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한 번은 등굣길에 손주가
“함미, 학교는 왜 4교시보다 5교시를 더 많이 하지요? 난 4교시를 더 많이 했으면 좋은데.”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손주가 이해하기 쉽게 나라에서 정한 교육과정이란 게 있는데 학년마다 꼭 공부를 해야만 하는 날짜와 수업 시간 수가 정해져 있어서 학교에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또 만약 4교시를 많이 하게 되면 나라에서 정한 공부할 날짜가 부족해져서 방학을 줄여 공부를 더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방학을 조금밖에 할 수가 없다고 초등 1학년에 맞게 대충 설명을 해줬다.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지만 녀석의 표정에는 여전히 4교시가 적은 것에 대해 아쉬워함이 역력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보내고 곧 1학년을 마무리하는 겨울 방학도 한 달이 채 안 남았다.
손주가 좋아하는 4교시하는 날 하교를 하면 손주와 내가(함미) 12시 40분에서 2시 10분까지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있다.
1. 우리(할머니, 할아버지)가 점심을 먹을 때까지 동화책 두 권 읽고 동화책을 다 읽으면 손주 혼자 자유놀이.
2. 수학 기본 연산 문제집 4쪽 풀기.
3. 할머니와 로봇 놀이하기.
4. 간식을 먹으며 손주가 좋아하는 분야의 다큐멘터리 TV 시청(최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 호와 남극 세종기지 대원들의 생활상을 봄)
5. 간식을 먹으며 손주가 즐겨 보는 영어 만화 시청.
6. 학원으로 출발.
3번 바로 함미와 로봇 놀이하기가 문제다.
손주는 최근에 이모에게 선물 받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멋있는 블록 로봇으로 놀이를 한다. 나에게는 저학년 수학 교구인 큐브로 뚝딱뚝딱 만들어 로봇이라며 손에 쥐어 준다. 언제나 그렇다. 손주 녀석은 항상 자기만 제대로 된 로봇을 갖고 놀아야 하고 나는 큐브 뭉텡이 로봇으로 놀아야 한다.
“에잇, 함미는 왜 매번 큐브로 된 로봇을 갖고 놀아야 하니?” 따질라치면
“함미, 이 로봇은 고장 나도 금방 고칠 수 있고 여긴 레이저 건, 이건 레이더 수신 기고 또 엄청 튼튼해요.” 하며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큐브 로봇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괜히 더심통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못 이기는 척 인심 쓰듯이
“대장, 오늘은 어디로 출동할까요? ”
“오늘은 남극 세종기지 근처 해저 탐사를 하기로 한다!”
로봇 놀이에서 대장은 언제나 손주, 역할 놀이에서는 대장 역할에 충실한 여덟 살짜리 손주는 언제나 예순이 넘은 함미 대원에게 반말을 한다.
로봇 놀이 주제는 최근에 시청한 남극 세종기지 하계 연구대원의 해양 탐사에 관한 놀이와 일 년 상주 대원인 월동대원들의 월동 생활에 대한 놀이를 한다.
4교시 손주의 일정 중 3번 로봇 놀이는 길게 할 수가 없다. 로봇 놀이를 하기 전에 손주 녀석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함미, 오늘은 숫자 7까지 될 때까지만 로봇 놀이를 해요.” 한다.
요즘 시계 보기를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유도하느라
“아하~~ 숫자 7, 숫자 6이 30분이니 숫자 7은 몇 분?” 하면 “ 6이 30분이니까 한 칸 더 가면 5를 더하면 35분까지요.”라는 답이 나온다.
로봇 놀이 다음에 tv를 봐야 할 순서가 기다리므로 주로 로봇 놀이는 약 15분 정도로 끝낸다.
“자 오늘은 해저 탐사로 해저 깊이가 2km나 된다. 먼저 로봇 팔을 해저로 내린다. 준비!!”
대장 로봇을 뒤따라 함미 큐브 로봇도 소파에서 내려 거실 바닥으로 출동 입으로 ‘쓔우웅~~ 쿠아~~~ 왕!’ 하며 해저로 내려간다.
손주는 진지하다.
해저에는 우리나라에 필요한 지하자원이 풍부한데 특히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금매 장지만 찾으면 우리나라는 엄청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단다.
손주 로봇과 함미 로봇은 해저 깊이에 로봇 팔을 내려 해저의 지층의 샘플을 채취하고 샘플을 하계 연구 대원에게 무사히 넘겨주고 임무가 완료되었다.
임무가 완료됨과 동시에 3번 로봇 놀이 일정도 끝난다. 하아~~ 함미의 부하 역할도 종료.
손주 덕분에 생전 한 번도 안 해본 로봇 놀이를 예순이 지나 허연 머리가 된 할머니가 되어서 할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큐브로 된 로봇을 손에 들고 손주 대장의 명령에 따라, 손주가 소리 내는 로봇 의성어를 흉내 내며 이리저리 팔을 흔들며 로봇 놀이를 하는 나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피식 입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손주가 진지하고도 엄숙한 목소리로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손주 또래의 어린 나이로 돌아가 유년의 시절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함미의 유년시절.
1960년대의 우리나라 대부분 서민의 삶이 팍팍하고 하루하루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근근이 버텨내야 했던 그 시절.
특히나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막노동하는 큰오빠와 올케 밑에서 자라야 했던 나의 유년시절은 지금도 생각조차 하기 싫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특히나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어지는 학습준비물, 육성회비, 숙제, 교복, 교우관계 등등.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집안 일손 돕기.
부모 없고 가난하고 허름한 입성에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주어지는 모멸감과 멸시를 받아야 했던 학생 신분의 긴 세월은 꿈도 희망도 없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 같은 시간이었다.
그 암흑의 시간을 버텨내 준건 아마도 가슴 한편에 간직한 ‘자존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아이라는 것.
공부는 돈이 없어도 부모가 없어도 찢어지게 가난해도 교과서와 열심히 씨름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어찌어찌 잘할 수 있다는 그 명확성.
그 명확한 명제 아래 시간을 버텨내며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손주와 로봇 놀이를 하는 할머니가 되어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아무튼 요즘 머리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 앉은 할머니가 되어 손주 덕분에 로봇 놀이를 하는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다.
손에 쥔 큐브 로봇을 흔들며 손주가 소리 내는 괴상한 로봇 소리를 따라 흉내 내며 잃어버렸던 유년기의 추억을 조금씩 찾아 쓰다듬어 보곤 한다.
내일은 월요일 4교시, 또 어떤 로봇 놀이가 기다리고 있을지 은근 기대한다.
이 은근한 기대와 평화로운 노년기의 나날을 보낼 수 있게 한 과거 나의 먼 시간 속 학창 시절의 버팀에 대해 스스로 대견해하며 마음을 보듬어준다.
‘그래, 잘 버텨냈고 잘 이겨낸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