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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그림 Aug 11. 2024

<왜인>에 대하여... 왜인 또는 왜의 지리적 위치

동아시아 고대 왜인과 왜국과 왜의 미스터리를 풀어내었음

다음, <천해>는 <현 발해>설이 기정 사실화됩니다.

A. 《북사》❰왜국전❱의 수수께끼의 기사


《북사》❰왜국전❱ 에는 아래의 기사가 나옵니다.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대하며, 또한 진기한 물품이 많다고 우러러보며,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한다.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중마한(中馬韓)은 중국 땅에 있던 마한이라는 뜻으로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의 탁월함이 엿보이는 명명입니다. 

단군조선의 전삼한(한반도/만주/차이나 동부) 후에 나온 후삼한은 차이나 하북성/산동성 지역에 조그마하게 있던, 번조선이 붕괴된 후 번조선의 후국 성격의, 삼한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후삼한을 범장이 탁월하게 중마한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 중마한의 동북쪽 땅 100리를 얻어서 온조가 나라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김부식>의 기사. 

▶ 각 골짜기에 진한 6부가 나누어 살았다는 기사. 

▶ BCE 39년 변한(卞韓)이 항복해 와 합쳐도(변진(弁辰)). 

▶ 이때 신라는 작은 마을 규모의 나라라 중마한에게 조공을 안 한다고 호통을 듣기도 합니다(<삼국사(김부식)-호공조>). 


말이 좋아 후삼한이지 사실상 중마한 하나이고 이때 백제 신라는 중마한의 속국도 아니고 속읍 정도의 규모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때 신라 옆에 <왜(국)>이 있었습니다. 

위의 호공이 바로 왜인으로서 박혁거세의 신라에 신하로 와있던 인물입니다. 


☘️ 왜국은 ❰양자강하류왜❱, ❰황하하류왜❱, ❰요동반도왜❱, ❰전라도영산강왜❱, ❰재팬열도왜❱가 있습니다. 


<북사><왜인전>의 위 기사에 나오는 <대국인 왜국>은 이중 ❰황하하류왜❱입니다. 

<중마한>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 토박이원주민이었고 금방 만들어진 100리 정도의 <백제>와 여섯개 산골짜기에 있던 <신라>보다는 규모가 컸기에 대국이라 칭한 것입니다.






B. 《삼국사-김부식》에 나오는 <왜인>과 위치 정리


1. 신라의 독립과 경상도로의 이주


중마한을 상국으로 모시던 <신라>는 <선도산 성모><파소>를 맞아 전기를 맞이합니다.

즉, <파소>는 <북부여>5대<고두막단군>의 딸입니다.

<고두막단군>은 유철(한무제)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서서 <한민족의 숙원>이었던 <고대요동-번조선/위만정권이 있던 지역>을 수복하여 한민족의 영웅이 되고 4대 해우루단군에게 선위를 받아 북부여 5대단군의 재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무공으로 <소해모수>란 별명으로도 불리웠던 6대<고무서단군>이 재위1년 만에 비극적으로 <황하전투>에서 사망하자 그만 <북부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고구리>가 추모대왕-유리왕-여율왕에 이어 <대무신왕>이 <홍산문명지역><만주지역><한반도북부지역>을 휩쓸면서 <북부여>의 국통맥을 <고구리>로 잇게 됩니다.)


--


고두막단군이 <고대요동>을 회복하고 고무서단군이 <중원>으로 전진하던 중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하여 <파소>는 <중마한>으로 들어가 <신라>에 합류하게 됩니다.

<파소>의 아들인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13세에 즉위한 것으로 미루어, 실질적으로 <파소>가 신라의 시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백제의 실질적인 시조가 <소서노>인 것에 비견됩니다.)


--


<파소>의 합류로 <신라>의 위상은 급상승합니다.


즉, 이를 계기로 후에 <한반도 경상도>로 이주해 <독립국 신라>로 일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먼저 이 지역(하북성/산동성)의 터줏대감인 <황하하류왜>의 합류를 이끕니다.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혁거세왕 38년>에는 BCE 20년 <호공(왜인임)>이 <중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왜인>도 신라왕을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석탈해>의 합류를 이끄는데, <석탈해>는 <왜인>으로서 <다파나국>사람인데,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왕 1년>에는 <다파나국>이 <왜국> 동북 1000리에 있다고 합니다.

이 <왜국>은 <황하하류왜>이므로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공-황하하류왜>과 <석탈해-요동반도왜>는 <신라>에 합류하여 <한반도 경상도>에서 <독립국 신라>로 일어서는데, 여기에는 <무역> 때문에 <요동반도>가 필요했던 <백제>와의 <빅딜>을 성공시킨 <석탈해>의 공이 컸습니다.

(이를 계기로 <석탈해>는 <신라왕성인 박성>에 참여하여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알지>가 합류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김알지가 신라3대 탈해왕(석탈해) 때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CE 65년), 김알지는 <가야>의 <김수로>와 마찬가지로 <왕망(실제로는 김망)>의 후손으로 CE 23년에 유수(후한 광무제)에게 왕망이 사망하자 <투후 김일제>의 후손 집단이 각지로 집단 망명하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신화적으로만 아래와 같이 표현되었을 뿐 신라가 아직 하북성/산동성에 있던 CE 59년 이전에 합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련 기사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이사금 9년❱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보고 돌아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 보자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 성을 ‘김’씨로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김알지는 <호공=하북성/산동성의 토착원주민 왜인 집단으로서 신라6촌의 땅을 제공>+<신라6촌 집단=신라의 기본 인구 제공>+<파소와 박혁거세=국통맥의 권위 제공>+<석탈해=요동반도 땅을 백제에 제공>+<김알지=신라가 경상도로 이주한 뒤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의 방식으로 기여한 후 역시 <신라왕성인 박성>에 참여하여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중마한 신라>의 <경상도 신라>로의 이주 관련 기사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이사금 1년❱ 『너무 길어 생략』

《삼국유사》❰기이-탈해왕❱ 『너무 길어 생략』

《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 『너무 길어 생략』

《북사》❰신라열전❱ 『신라는 고구리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는 낙랑땅을 차지하였다. --- 그 나라 사람은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위섞여 있으며, 옥저/불내/한/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독립하였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2. <전라도영산강왜>와 <재팬열도왜>


이들 <중마한 신라>의 <경상도 신라> 이주 시점은 CE 59년 겨울입니다.

그런데,<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왕 17년, CE 73년>에 <왜인>이 <신라>의 <목출도>를 침략합니다.

이때의 <신라>는 <경상도 신라>이므로 이 <왜인>은 <전라도영산강왜>입니다.

<백제>는 <경상도 신라>가 자신을 <상국>으로 대우하지 않자, <부용국>인 <전라도영산강왜>를 동원하여 <경상도 신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 <전라도영상강왜>는 훗날의 <포상8국>으로 <가야>와 <신라>를 공격하고 CE 399년에 <신라>에 대규모로 항복한 후, <광개토태왕>에 명령에 따라 CE 403~405년에 재팬열도로 보내집니다.


--


<가야>는 국초부터 <현 대마도>인 <임나>를 소유했습니다.



☘️ 가야는 국초부터 《임나》인 대마도를 소유


♣️ 근거1.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임나》가 대마도이고, 국미성은 《임나》의 치소』. 

♣️ 근거2. <삼국유사>❰가락국기❱『동은 황산강으로 서남은 창해로 서북은 지리산으로 동북은 가야산으로 남쪽에선 국미로 하였다.』


☘️ ((위 두 기사를 종합한 의미)) 가야는 국초부터 《임나》인 대마도를 소유하였다.


☘️ 그런데 다른 책도 아닌 바로 <일본서기>에 《임나》가 대마도라는 확실한 기록이 나옵니다.

♣️ <일본서기><BCE 33년> 『任那者去축자국, 이천여리, 北阻海以在계림之西南』

☘️ 이 기사에 대한 해석은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일본서기>가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가야의 북쪽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세살먹은 어린애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경상도인 신라(즉, 계림)의 서남쪽에 있으면서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은 제주도 아니면 대마도입니다. 

그런데, 제주도는 <고대환황해해상무역로>에서 비켜나 있는 곳이므로 임나는 대마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런 식으로 <환단고기>가 <삼국유사>등의 고대 사서와 교차검증되기에 국내외 역사논문에 많이 인용되는 것입니다.


☘️ 아울러, <임나>가 <대마도>라면, <임나일본부설>은 기껏해야 <대마도>만을 소유한 것이므로 <한반도 남부를 4세기부터 200년 동안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일본서기> 기록에 의해서...



이러한 <가야>는 <대마도>와 <구주-큐우슈우>의 <재팬열도왜>를 꾸준히 복속시켜 <부용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야> 자체는 <백제>를 <상국>으로 대우하여 <독립국>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야>가 <삼국-고구리/백제/신라>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무튼 이것을 <재팬열도의 가야 분국>이라고 흔히 칭합니다.






C. 그밖의 사서에 나오는 <왜인>과 위치


이것이 <삼국사-김부식>에 등장하는 <왜인-왜국>의 위치에 대한 정리입니다.


이외에 <양자강하류왜>는 차이나 사서에 <월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소요유❱에서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문신을 하는 풍습은 <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기》❰오태백세가❱에는 아래의 기사가 있습니다.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태왕(周太王), 주나라 시조)에게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태백(太伯, 오나라의 시조, 주태왕의 장자)과 차남 중옹(仲雍)은 막내동생 계력<季歷, 주공계(周公季), 주태왕의 삼남, 태백의 셋째 동생>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하여 장강남안(長江南岸)의 형산(衡山)으로 가서 정착하여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오나라). 나중에 계력은 형인 태백과 중옹을 중원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태백과 중옹은 계력의 말을 거절하였고,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


당시에 문신을 새기는 것은 남방 이민족인 <왜인>의 풍습이니, 스스로 문신을 새긴것은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범엽/진수>의 <후한서/삼국지>에 <오환선비동이전> 중 <진한(즉, 중마한의 신라)>의 풍습을 다룬 부분에 "왜에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男女近倭亦文身)"이라는 기사가 나오듯이 문신을 하는 것은 <왜인>의 풍습인 것입니다.

(이 기사는 <중마한의 신라>에 호공과 석탈해 등의 왜인이 합류해 있어서 문신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을 과장되게 오인하여 기록한 기사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재팬을 찾았던 김성일이 1590년에 남긴 기록 속에서도 <대마도>와 <재팬열도>의 문신 풍습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양자강하류왜>도 같은 <왜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D. <왜인 위치 추정도>와 그 해석


이상을 종합하면 아래의 지도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왜인 위치 추정도


보통 같은 풍습을 가진 민족이 한 곳에 집중되어 나라를 구성하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왜국>은 동아시아 전역에 분산되어 존재합니다.


이런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왜인>들이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각 지역에 진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서에 기록된 동아시아의 <왜인>들은 <발달된 문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왜인들이 고기잡이 기술이나 잠수 기술로는 사서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지만, 선박건조술로는 왜인들이 회자된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어느 한 곳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 각지로 흝어진 것이 아닙니다.

◆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


이게 가장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E. 결론을 이끄는 <서해평야 시대>


결론적으로 <왜인>들은 사서에 나오는 각자의 그 자리에 배를 타고서 간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갔습니다.



사서에 나오는 <왜인>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기잡이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업이 어업이라는 뜻입니다.


어업을 하려면 큰 강의 하류나 바닷가에 거주해야 합니다.


<양자강하류><황하하류><요동반도><전라도영산강><재팬열도>는 이러한 큰 강의 하류나 바닷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천년전까지는 <현 서해바다>는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황하+요하+압록강+대동강+한강+영산강>이 지류인 세계 최대의 강 <고은하>가 그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계 최대의 온대지역 평야인 <서해평야>가 있었습니다.



서해평야와 왜인들의 이동


이 <서해평야>가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로 변하자 점진적으로 각 지역의 강하류나 바닷가로 이동한 것이 <양자강하류><황하하류><요동반도><전라도영산강><재팬열도>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대한 서해바다와 대한해협이 등장해서 이들 왜인들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지 이들이 바다를 항해하여 각지로 흝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압록강과 대동강과 한강에는 <왜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즉, 이들 <왜인>들은 <강 하류>와 <바닷가>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고은하>의 하류와 <고대 양자강>의 하류와 <구주-큐우슈우> 밑의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서해바다와 대한해협이 생기자 점차 육지로 물러서서 거주하게 된 곳이 <양자강하류><전라도영산강하류><대마도><구주-큐우슈우>인 것입니다.


또한, 8천년전 당시 거대 내륙호수였던 <현 발해>의 호숫가에도 <왜인>들이 살았는데, 이들은 이주할 필요가 없이 거의 그 자리에 그대로 거주한 것이 <북쪽 황하하류><요동반도>인 것입니다.




PS.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다는 것의 증명


☘️ 《환단고기》는 환국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

『《고기》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 천해는 지금의 <북해>이다.』


☘️ <천해>는 <현 발해>입니다. 

<현 발해>는 서해평야가 있던 시절에도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 호수가 있었습니다. 

현 발해의 수심이 낮은 것은 황하와 요하에서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서해평야가 있던 15000년전~8천년전에는 거대 내륙호수였던 것입니다. 


<황하>와 <요하>가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은 것을 감안하면, 최초의 <천해-현 발해>는 지금의 태항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동해안을 연상하면 됩니다.
즉, 한반도 동해안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호수"라고 위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이 <천해>의 동쪽이 바로 한반도인데, 이 당시(15000년전 ~ 8000년전)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서해평야 지대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천해>는 또 <북해>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서해-환국을 기준으로는 서해임>라고도 불리고 <북해>라고도 불린 바다는 <발해>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동아시아 사서에 발해가 북해로 나옵니다. 


《산해경》〈해내경〉

『동해의 안쪽, 북해의 주변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요약하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천해>가 <현 발해>이므로 <현 발해>는 8000년전까지는 <거대 내륙호수>였다"라는 것입니다.


한반도 주변 지도(9천 년 전 vs 8천 년 전)




F.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다는 것의 증명


☘️ 《환단고기》는 환국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

『《고기》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 천해는 지금의 <북해>이다.』


☘️ <천해>는 <현 발해>입니다. 

<현 발해>는 서해평야가 있던 시절에도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 호수가 있었습니다. 

현 발해의 수심이 낮은 것은 황하와 요하에서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서해평야가 있던 15000년전~8천년전에는 거대 내륙호수였던 것입니다. 


<황하>와 <요하>가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은 것을 감안하면, 최초의 <천해-현 발해>는 지금의 태항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동해안을 연상하면 됩니다.
즉, 한반도 동해안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호수"라고 위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이 <천해>의 동쪽이 바로 한반도인데, 이 당시(15000년전 ~ 8000년전)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서해평야 지대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천해>는 또 <북해>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서해-환국을 기준으로는 서해임>라고도 불리고 <북해>라고도 불린 바다는 <발해>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동아시아 사서에 발해가 북해로 나옵니다. 


《산해경》〈해내경〉

『동해의 안쪽, <북해>의 주변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요약하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천해>가 <현 발해>이므로 <현 발해>는 8000년전까지는 <거대 내륙호수>였다"라는 것입니다.



한반도 주변 지도(9천 년 전 vs 8천 년 전)




G. 사서에 등장하는 <왜인>의 미스터리를 풀면 밝혀지는 것들


☘️ 사서에 등장하는 <왜인>의 미스터리를 풀자 여러 동아시아 역사 속의 수수께끼들이 해소가 됩니다.


☘️ 먼저, <서해평야>가 기정 사실화됩니다.


이 부분은 과학으로 밝혀져서 더이상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지만, 아무튼 이 과학적인 사실이 <사서의 기록으로 재차 증명>되었다는 것이 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서해평야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서>에 서해평야가 안 나와 있다"라고 주장할 때 효과적인 반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해평야는 8000년전이므로 역사 시대 이전입니다.

따라서 <사서>에 남아 있기가 불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사서>로 증명하라고 한다면 반칙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서> 뒤에 숨어서 저격해 오던 무리들(강단역사학참칭소설학자들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가 "<상전벽해>라는 사자성어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속담에 8000년전 서해평야가 서해바다로 수몰되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커다란 무기가 생긴 것입니다.



<사서>에 등장하는 <왜인>의 위치를 <서해평야설>보다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습니다.

이 <왜인 위치를 서해평야로 설명하는 설>을 반박하려면 아래와 같이 하면 됩니다.


서해평야설 : <(북쪽)황하하류><요동반도>, <양자강하류>, <전라도영산강>, <대마도><구주-큐우슈우>에만 왜인이 존재한 것으로 사서에는 나온다. 즉, <회하>,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에 왜인이 존재했다는 사서의 기록이 없다.


서해평야설에 대한 반박 : <회하>,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에 왜인이 존재했다는 사서의 기록을 가지고 오면 된다.


---


<왜인>이 <단지 물가가 좋아서 물가에 산다>라는 가설이 입증되려면 최소한 <모든 강>에 왜인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사서>에는 왜인이 <(북쪽)황하하류><요동반도>, <양자강하류>, <전라도영산강>, <대마도><구주-큐우슈우>에만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① 왜인이 이동을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었으며, ② 왜인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최소 8000년전부터 역사시대까지 계속 거주했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동을 좋아하는 민족이 아닌데(즉, 바로 밑의 남쪽 황하하류 및 바로 위의 회하하류 조차도 이동해 살지 않았다!), 동아시아 전역에 흝어져서 분포해 있는 이 <왜인>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이론은 현재까지는 <서해평야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 다음, <천해>는 <현 발해>설이 기정 사실화됩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현 발해> 위치에 <서해평야>시기에는 <거대 내륙호수>가 있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지형을 표현한 여러 지도를 보면 <거대 내륙호수>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고 안 그려놓은 지도도 있습니다.

왜냐면 <서해 수심도>를 보면 <현재의 발해의 수심>은 다른 서해바다보다도 낮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해 수심도 (자료 출처  ocaen.colorado.edu)



하지만, 수천년 동안 황하와 요하에서 퍼부은 토사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8000년전에는 <현 발해>는 굉장히 수심이 깊은 <거대 내륙호수>였습니다.

(현재에도 황하에서 퍼붓는 토사로 인하여 1년에 1km²의 새로운 땅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 이것을 <사서>를 통해 입증한 것이 <(북쪽) 황하하류왜>+<요동반도왜>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음은 이제 확고한 정설이 된 것입니다.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다면, 이것이 <천해>라는 것에 힘이 더욱 실립니다.



즉, 세계적으로 <서해-환국을 기준으로는 서해임>라고도 불리고 <북해>라고도 불린 바다는 <발해> 외에는 없습니다. 


<환국>시대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서해가 평야이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세계 최대의 온대지역 평야였던 <서해평야>를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현 발해-당시 거대 내륙호수>는 <천해>의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현재까지 통설인 <환국-중앙아시아설>은 <환단고기>의 <파내류산>이 일본 중세시대인 1607년에 발단된 백과사전 개념의 <화한삼재도회>라는 책에서 한자 <天>이 조선어 발음으로 <파늘=波奈留>로 발음된다에서 <하늘산>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천산산맥>으로 비정된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지명>이 일치한다고 그곳으로 비정한 것 뿐, 그 지역에서 아무런 <환국시대 유적/유물>이 발굴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내류산>을 <천산산맥>으로 비정함에 따라 이루어진 <천해-바이칼호>설 등은 <발해-천해>설로 인하여 입지가 좁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을 위시한 무수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 미국 연구소에서 1만5천년 전으로 공인한 세계 최초의 순화벼인 <청원소로리볍씨>같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요. 

<환단고기>에서 <환국>의 위치를 설명할 때 사용된 <파내류산>은 <현 강화도>로 비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국-중앙아시아설>에서 취약한 <유적/유물> 때문에 "<환국>=<서해평야>≈<한반도>설"이 더욱 확고하게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다음,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지가 <한반도>로 확정됩니다.


동아시아 민족을 크게 <한민족>, <차이나민족>, <재팬민족>이라고 할 때, 지금은 이렇게 나뉘어 있지만, 기원을 따라가면 <하나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은 사실 <종주국>이 누구냐의 싸움으로 귀결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제황국사관-재팬>과 <강단식민사학-한국>을 제외한다면, 재팬은 일단 제쳐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주국>이 <차이나>냐 <한국>이냐의 싸움이 됩니다.


"" <환국=서해평야=한반도 설>이 확정되면 드디어 <종주국 논쟁>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입니다.



실, 차이나 민족은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데 실패했습니다.


차이나 민족의 시조로 삼는 <황제 헌원>의 계보를 찾다보면 <태호 복희>가 나오고 이 <태호 복희>는 <차이나 사서>에 <동이족>이라고 나오고 하는 식입니다.


결국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에서 "<동이는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차이나 학자들이 <동이>는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찾을 수 있었지만, <서쪽에 있는 하(夏) 또는 화(華)>는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찾을 수 없어 현재는 포기한 상태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황하문명>으로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던 판에 차이나 민족 입장의 <오랑캐의 땅>인 <만리장성 이북>에서 황하문명을 수천년 앞서는 <홍산문명>이 발굴되니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이것을 <황제 헌원>이 <유웅족(有熊族)>이라는 사서의 기록 한줄을 이용하여, <홍산문명-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된 <곰발 조소>와 <곰이빨 조소>로 "<홍산문명이 차이나 민족의 기원>이고 <동아시아 모든 문명의 기원>이다"라고 <차이나가 여전히 종주국임>을 견강부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산문명>은 시대 구분상 <환웅의 신시배달국>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환웅이 3000명의 제세핵랑군대를 이끌고 출발한 <환국>의 수몰되지 않고 남은 땅이 바로 <한반도>라면 <한국이 동아시아 종주국임>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이나가 어떠한 견강부회로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기 힘든 거대한 통곡의 벽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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