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고대 왜인과 왜국과 왜의 미스터리를 풀어내었음
다음, <천해>는 <현 발해>설이 기정 사실화됩니다.
《북사》❰왜국전❱ 에는 아래의 기사가 나옵니다.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대하며, 또한 진기한 물품이 많다고 우러러보며,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한다.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仰之, 恒通使往來.』
중마한(中馬韓)은 중국 땅에 있던 마한이라는 뜻으로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의 탁월함이 엿보이는 명명입니다.
단군조선의 전삼한(한반도/만주/차이나 동부) 후에 나온 후삼한은 차이나 하북성/산동성 지역에 조그마하게 있던, 번조선이 붕괴된 후 번조선의 후국 성격의, 삼한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후삼한을 범장이 탁월하게 중마한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 중마한의 동북쪽 땅 100리를 얻어서 온조가 나라를 건국했다는 <삼국사-김부식>의 기사.
▶ 각 골짜기에 진한 6부가 나누어 살았다는 기사.
▶ BCE 39년 변한(卞韓)이 항복해 와 합쳐도(변진(弁辰)).
▶ 이때 신라는 작은 마을 규모의 나라라 중마한에게 조공을 안 한다고 호통을 듣기도 합니다(<삼국사(김부식)-호공조>).
말이 좋아 후삼한이지 사실상 중마한 하나이고 이때 백제 신라는 중마한의 속국도 아니고 속읍 정도의 규모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때 신라 옆에 <왜(국)>이 있었습니다.
위의 호공이 바로 왜인으로서 박혁거세의 신라에 신하로 와있던 인물입니다.
☘️ 왜국은 ❰양자강하류왜❱, ❰황하하류왜❱, ❰요동반도왜❱, ❰전라도영산강왜❱, ❰재팬열도왜❱가 있습니다.
<북사><왜인전>의 위 기사에 나오는 <대국인 왜국>은 이중 ❰황하하류왜❱입니다.
<중마한>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 토박이원주민이었고 금방 만들어진 100리 정도의 <백제>와 여섯개 산골짜기에 있던 <신라>보다는 규모가 컸기에 대국이라 칭한 것입니다.
중마한을 상국으로 모시던 <신라>는 <선도산 성모><파소>를 맞아 전기를 맞이합니다.
즉, <파소>는 <북부여>5대<고두막단군>의 딸입니다.
<고두막단군>은 유철(한무제)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서서 <한민족의 숙원>이었던 <고대요동-번조선/위만정권이 있던 지역>을 수복하여 한민족의 영웅이 되고 4대 해우루단군에게 선위를 받아 북부여 5대단군의 재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무공으로 <소해모수>란 별명으로도 불리웠던 6대<고무서단군>이 재위1년 만에 비극적으로 <황하전투>에서 사망하자 그만 <북부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고구리>가 추모대왕-유리왕-여율왕에 이어 <대무신왕>이 <홍산문명지역><만주지역><한반도북부지역>을 휩쓸면서 <북부여>의 국통맥을 <고구리>로 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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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막단군이 <고대요동>을 회복하고 고무서단군이 <중원>으로 전진하던 중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하여 <파소>는 <중마한>으로 들어가 <신라>에 합류하게 됩니다.
<파소>의 아들인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13세에 즉위한 것으로 미루어, 실질적으로 <파소>가 신라의 시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백제의 실질적인 시조가 <소서노>인 것에 비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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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소>의 합류로 <신라>의 위상은 급상승합니다.
즉, 이를 계기로 후에 <한반도 경상도>로 이주해 <독립국 신라>로 일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먼저 이 지역(하북성/산동성)의 터줏대감인 <황하하류왜>의 합류를 이끕니다.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혁거세왕 38년>에는 BCE 20년 <호공(왜인임)>이 <중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왜인>도 신라왕을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석탈해>의 합류를 이끄는데, <석탈해>는 <왜인>으로서 <다파나국>사람인데,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왕 1년>에는 <다파나국>이 <왜국> 동북 1000리에 있다고 합니다.
이 <왜국>은 <황하하류왜>이므로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공-황하하류왜>과 <석탈해-요동반도왜>는 <신라>에 합류하여 <한반도 경상도>에서 <독립국 신라>로 일어서는데, 여기에는 <무역> 때문에 <요동반도>가 필요했던 <백제>와의 <빅딜>을 성공시킨 <석탈해>의 공이 컸습니다.
(이를 계기로 <석탈해>는 <신라왕성인 박성>에 참여하여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알지>가 합류하는데, 역사적으로는 김알지가 신라3대 탈해왕(석탈해) 때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CE 65년), 김알지는 <가야>의 <김수로>와 마찬가지로 <왕망(실제로는 김망)>의 후손으로 CE 23년에 유수(후한 광무제)에게 왕망이 사망하자 <투후 김일제>의 후손 집단이 각지로 집단 망명하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신화적으로만 아래와 같이 표현되었을 뿐 신라가 아직 하북성/산동성에 있던 CE 59년 이전에 합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련 기사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이사금 9년❱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보고 돌아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 보자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 성을 ‘김’씨로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김알지는 <호공=하북성/산동성의 토착원주민 왜인 집단으로서 신라6촌의 땅을 제공>+<신라6촌 집단=신라의 기본 인구 제공>+<파소와 박혁거세=국통맥의 권위 제공>+<석탈해=요동반도 땅을 백제에 제공>+<김알지=신라가 경상도로 이주한 뒤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의 방식으로 기여한 후 역시 <신라왕성인 박성>에 참여하여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중마한 신라>의 <경상도 신라>로의 이주 관련 기사
《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이사금 1년❱ 『너무 길어 생략』
《삼국유사》❰기이-탈해왕❱ 『너무 길어 생략』
《삼국유사》❰기이-가락국기❱ 『너무 길어 생략』
《북사》❰신라열전❱ 『신라는 고구리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는 낙랑땅을 차지하였다. --- 그 나라 사람은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위섞여 있으며, 옥저/불내/한/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독립하였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이들 <중마한 신라>의 <경상도 신라> 이주 시점은 CE 59년 겨울입니다.
그런데,<삼국사-김부식><신라본기-탈해왕 17년, CE 73년>에 <왜인>이 <신라>의 <목출도>를 침략합니다.
이때의 <신라>는 <경상도 신라>이므로 이 <왜인>은 <전라도영산강왜>입니다.
<백제>는 <경상도 신라>가 자신을 <상국>으로 대우하지 않자, <부용국>인 <전라도영산강왜>를 동원하여 <경상도 신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 <전라도영상강왜>는 훗날의 <포상8국>으로 <가야>와 <신라>를 공격하고 CE 399년에 <신라>에 대규모로 항복한 후, <광개토태왕>에 명령에 따라 CE 403~405년에 재팬열도로 보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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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국초부터 <현 대마도>인 <임나>를 소유했습니다.
♣️ 근거1.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임나》가 대마도이고, 국미성은 《임나》의 치소』.
♣️ 근거2. <삼국유사>❰가락국기❱『동은 황산강으로 서남은 창해로 서북은 지리산으로 동북은 가야산으로 남쪽에선 국미로 하였다.』
☘️ ((위 두 기사를 종합한 의미)) 가야는 국초부터 《임나》인 대마도를 소유하였다.
☘️ 그런데 다른 책도 아닌 바로 <일본서기>에 《임나》가 대마도라는 확실한 기록이 나옵니다.
♣️ <일본서기><BCE 33년> 『任那者去축자국, 이천여리, 北阻海以在계림之西南』
☘️ 이 기사에 대한 해석은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 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일본서기>가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상남도에 있는 가야의 북쪽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세살먹은 어린애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경상도인 신라(즉, 계림)의 서남쪽에 있으면서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은 제주도 아니면 대마도입니다.
그런데, 제주도는 <고대환황해해상무역로>에서 비켜나 있는 곳이므로 임나는 대마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런 식으로 <환단고기>가 <삼국유사>등의 고대 사서와 교차검증되기에 국내외 역사논문에 많이 인용되는 것입니다.
☘️ 아울러, <임나>가 <대마도>라면, <임나일본부설>은 기껏해야 <대마도>만을 소유한 것이므로 <한반도 남부를 4세기부터 200년 동안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일본서기> 기록에 의해서...
이러한 <가야>는 <대마도>와 <구주-큐우슈우>의 <재팬열도왜>를 꾸준히 복속시켜 <부용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야> 자체는 <백제>를 <상국>으로 대우하여 <독립국>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야>가 <삼국-고구리/백제/신라>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무튼 이것을 <재팬열도의 가야 분국>이라고 흔히 칭합니다.
이것이 <삼국사-김부식>에 등장하는 <왜인-왜국>의 위치에 대한 정리입니다.
이외에 <양자강하류왜>는 차이나 사서에 <월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소요유❱에서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문신을 하는 풍습은 <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기》❰오태백세가❱에는 아래의 기사가 있습니다.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태왕(周太王), 주나라 시조)에게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태백(太伯, 오나라의 시조, 주태왕의 장자)과 차남 중옹(仲雍)은 막내동생 계력<季歷, 주공계(周公季), 주태왕의 삼남, 태백의 셋째 동생>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하여 장강남안(長江南岸)의 형산(衡山)으로 가서 정착하여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오나라). 나중에 계력은 형인 태백과 중옹을 중원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태백과 중옹은 계력의 말을 거절하였고,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
당시에 문신을 새기는 것은 남방 이민족인 <왜인>의 풍습이니, 스스로 문신을 새긴것은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범엽/진수>의 <후한서/삼국지>에 <오환선비동이전> 중 <진한(즉, 중마한의 신라)>의 풍습을 다룬 부분에 "왜에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男女近倭亦文身)"이라는 기사가 나오듯이 문신을 하는 것은 <왜인>의 풍습인 것입니다.
(이 기사는 <중마한의 신라>에 호공과 석탈해 등의 왜인이 합류해 있어서 문신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을 과장되게 오인하여 기록한 기사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재팬을 찾았던 김성일이 1590년에 남긴 기록 속에서도 <대마도>와 <재팬열도>의 문신 풍습에 대한 묘사가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양자강하류왜>도 같은 <왜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아래의 지도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같은 풍습을 가진 민족이 한 곳에 집중되어 나라를 구성하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왜국>은 동아시아 전역에 분산되어 존재합니다.
이런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왜인>들이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각 지역에 진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서에 기록된 동아시아의 <왜인>들은 <발달된 문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왜인들이 고기잡이 기술이나 잠수 기술로는 사서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지만, 선박건조술로는 왜인들이 회자된 경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어느 한 곳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 각지로 흝어진 것이 아닙니다.
◆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
이게 가장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결론적으로 <왜인>들은 사서에 나오는 각자의 그 자리에 배를 타고서 간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갔습니다.
사서에 나오는 <왜인>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기잡이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업이 어업이라는 뜻입니다.
어업을 하려면 큰 강의 하류나 바닷가에 거주해야 합니다.
<양자강하류><황하하류><요동반도><전라도영산강><재팬열도>는 이러한 큰 강의 하류나 바닷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황하+요하+압록강+대동강+한강+영산강>이 지류인 세계 최대의 강 <고은하>가 그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계 최대의 온대지역 평야인 <서해평야>가 있었습니다.
이 <서해평야>가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로 변하자 점진적으로 각 지역의 강하류나 바닷가로 이동한 것이 <양자강하류><황하하류><요동반도><전라도영산강><재팬열도>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대한 서해바다와 대한해협이 등장해서 이들 왜인들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지 이들이 바다를 항해하여 각지로 흝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압록강과 대동강과 한강에는 <왜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즉, 이들 <왜인>들은 <강 하류>와 <바닷가>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고은하>의 하류와 <고대 양자강>의 하류와 <구주-큐우슈우> 밑의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 《환단고기》는 환국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
『《고기》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 천해는 지금의 <북해>이다.』
☘️ <천해>는 <현 발해>입니다.
<현 발해>는 서해평야가 있던 시절에도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 호수가 있었습니다.
서해평야가 있던 15000년전~8천년전에는 거대 내륙호수였던 것입니다.
<황하>와 <요하>가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은 것을 감안하면, 최초의 <천해-현 발해>는 지금의 태항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동해안을 연상하면 됩니다.
즉, 한반도 동해안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호수"라고 위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이 <천해>의 동쪽이 바로 한반도인데, 이 당시(15000년전 ~ 8000년전)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서해평야 지대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천해>는 또 <북해>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서해-환국을 기준으로는 서해임>라고도 불리고 <북해>라고도 불린 바다는 <발해>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동아시아 사서에 발해가 북해로 나옵니다.
《산해경》〈해내경〉
『동해의 안쪽, 북해의 주변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 《환단고기》는 환국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
『《고기》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 천해는 지금의 <북해>이다.』
☘️ <천해>는 <현 발해>입니다.
<현 발해>는 서해평야가 있던 시절에도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 호수가 있었습니다.
서해평야가 있던 15000년전~8천년전에는 거대 내륙호수였던 것입니다.
<황하>와 <요하>가 수천년 동안 토사를 퍼부은 것을 감안하면, 최초의 <천해-현 발해>는 지금의 태항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반도 동해안을 연상하면 됩니다.
즉, 한반도 동해안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현 발해의 크기만한 거대 내륙호수"라고 위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이 <천해>의 동쪽이 바로 한반도인데, 이 당시(15000년전 ~ 8000년전)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서해평야 지대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천해>는 또 <북해>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세계적으로 <서해-환국을 기준으로는 서해임>라고도 불리고 <북해>라고도 불린 바다는 <발해>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동아시아 사서에 발해가 북해로 나옵니다.
《산해경》〈해내경〉
『동해의 안쪽, <북해>의 주변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 사서에 등장하는 <왜인>의 미스터리를 풀자 여러 동아시아 역사 속의 수수께끼들이 해소가 됩니다.
이 부분은 과학으로 밝혀져서 더이상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지만, 아무튼 이 과학적인 사실이 <사서의 기록으로 재차 증명>되었다는 것이 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사실 서해평야는 8000년전이므로 역사 시대 이전입니다.
따라서 <사서>에 남아 있기가 불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사서>로 증명하라고 한다면 반칙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서> 뒤에 숨어서 저격해 오던 무리들(강단역사학참칭소설학자들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가 "<상전벽해>라는 사자성어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속담에 8000년전 서해평야가 서해바다로 수몰되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커다란 무기가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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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과학적으로는 <현 발해> 위치에 <서해평야>시기에는 <거대 내륙호수>가 있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지형을 표현한 여러 지도를 보면 <거대 내륙호수>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고 안 그려놓은 지도도 있습니다.
왜냐면 <서해 수심도>를 보면 <현재의 발해의 수심>은 다른 서해바다보다도 낮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황하와 요하에서 퍼부은 토사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8000년전에는 <현 발해>는 굉장히 수심이 깊은 <거대 내륙호수>였습니다.
(현재에도 황하에서 퍼붓는 토사로 인하여 1년에 1km²의 새로운 땅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음은 이제 확고한 정설이 된 것입니다.
<현 발해>가 <거대 내륙호수>였다면, 이것이 <천해>라는 것에 힘이 더욱 실립니다.
동아시아 민족을 크게 <한민족>, <차이나민족>, <재팬민족>이라고 할 때, 지금은 이렇게 나뉘어 있지만, 기원을 따라가면 <하나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은 사실 <종주국>이 누구냐의 싸움으로 귀결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제황국사관-재팬>과 <강단식민사학-한국>을 제외한다면, 재팬은 일단 제쳐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주국>이 <차이나>냐 <한국>이냐의 싸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