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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Nov 18. 2024

텅 빈 들판에서

남겨진 건 무엇

마을 앞은 꽤 넓은 들판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내려앉은 새벽안개는 깊고 아득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한참을 바라봤다. 고요와 멈춤의 배경에 젖어들 때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비움에서 충만을 누릴 수 있는 건 봄부터 이어진 채움과 결실의 시간 덕분이다. 

논은 정직하다. 논은 단순함의 극치다. 가장 단순한 과정과 노력과 시간으로 생명의 알갱이를 쏟아 낸다. 모내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푸르른 대지는 황금빛으로 물들 때까지 빈틈이 없다. 그 틈 사이로 무수한 햇살이 내리쬐고 바람이 지나가고 비가 쏟아지며 뭇 새들이 날아다닌다. 농부의 발걸음과 땀방울도 적당한 양분이 되어 흩뿌려졌다. 벼가 익어가는 시간은 한 해가 시작되고 끝나는 절정의 순간들과 함께 한다.


기계화와 자동화는 농촌에도 빠르게 파고들었다. 거의 모든 작업이 기계로 이루어진다. 심는 일, 캐는 일, 베는 일, 고르는 일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가능한 시대다. 시대는 일의 능률과 편안함을 선물했지만 오랜 된 농부는 편하고 쉬운 노동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몸에 밴 천성을 감추지 못한 채 쉽고 빠른 작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일을 빼앗겨 버린 농부의 표정과 자세는 기계를 바라보며 어정쩡하다. 농부는 그가 살아온 세월의 두께와 넓이만큼이나 마주하는 지금이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외롭고 고달파 보이는 농부의 모습은 노동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 꿈틀대는 본능을 잃어버린 시간들 때문이다. 이제는 몇 천 평의 모내기도 한나절이면 끝난다.


어릴 적, 함께 하는 노동의 결정판이었던 모내기 장면이 아련히 떠오른다. 써레질을 마친 논에 물이 찰랑댄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바지를 걷어붙이고 맨발로 조심스레 논에 들어가 일렬로 길게 줄지어 선다. 가지런히 늘어진 줄과 간격에 맞춰 모를 심는다. 못 줄을 잡는 일은 보통 아이들 몫이다. 중요한 건 간격이다. 일정한 넓이로 속도에 맞게 줄을 떼고 놓기를 반복해야 한다. 건너편 동료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허리 숙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에 한순간이라도 흐트러 지면 여지없이 날카로운 눈초리가 날아든다. 리듬을 끊거나 간격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의 강도는 심해지고 속도는 더뎌진다. 그 시절 모내기는 동네의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였다. 집집마다 논에 물을 대고 모 심을 날짜를 조정해 가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했다. 공동체의 가장 이상적인 작업은 조화와 균형을 통해 오랜 시간 이어졌다. 초록의 어린 모가 물을 흠뻑 먹고 자라는 모습은 싱그럽고 넉넉했다. 모내기가 끝난 촘촘하고 정갈한 논에는 백로들이 날아든다. 두고 온 새끼들 걱정에 고개 들어 먼 산 보는 시간은 길어진다. 마음은 분주한데 제 밥그릇  챙긴다고 남의 밥그릇 뺏으면 안 되는 걸 아는지 내딛는 걸음걸음은 사뿐 싸 뿐  조심스럽다. 품위는 스스로 지키는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발걸음이다.


모가 생명이 깃든 쌀이 되는 시간은 단순하다. 매일 아침 논으로 향한 농부의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아마 누군가를 키워내는 일도 이처럼 말없이 매일을 지켜보는 날들이면 되지 않을까.

모가 자라 벼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소박하다. 농부의 짠 내 나는 땀방울로 간을 맞춰 햇빛 한 줌, 바람 한 점 물에 말아먹고 쑥쑥 자란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벼는 당당하고 거침없다. 간혹 예상치 못한 비바람에 맥없이 쓰러지기도 하지만 알곡을 영글어 가는 본성은 잃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 벼가 익어가는 들판은 황금색이 된다.


벼를 수확하고 난 뒤 볏짚은 여러 용도로 쓰였다. 흙집을 지을 때 황토와 함께 버물려져 단단하고 살아 숨 쉬는 벽체가 되었다.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용기를 만들어 유용하게 썼다. 밥을 짓고 군불을 때는 불쏘시개로 안성맞춤이었다. 소의 먹이가 되고 남은 볏짚은 그대로 부식되어 다시 거름이 되었다. 벼가 익어 쌀이 되는 순간까지 버려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벼의 부산물인 왕겨와 쌀겨, 청치는 꼬꼬들의 중요한 모이가 되고 바닥과 알을 낳는 곳의 푹신한 배경이 된다. 쓰임새로 보면 그 헌신에 고개 숙여진다.


언제부턴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커다란 공룡알들이 점점이 놓였다. 한 해 농사의 마무리를 상징하는 증표가 되었다. 정식 명칭은 '곤포사일리지'이지만 우리는'마시멜로'라고 부른다. 용도는 소들이 먹을 건초다. 볏짚을 돌돌 말아 산소가 들어가지 못하게 비닐로 칭칭 감아 싸맨다. 모든 작업은 역시 기계가 한다. 


요즘 벼는 시대에 맞게 품종이 개량되어 쓰임새도 한정되었다. 볏짚도 작아 많은 기능을 상실했다. 남김없이 걷힌 볏짚으로 논은 점점 거칠고 메마른 땅이 된다. 


농부는 결실을 거두어 갈 때 땅과 자연에 남겨 두고 돌려주어야 할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농부에게 남겨진 그 무엇은 가늠할 수 없는 가치로 돌아온다. 무언가 끝난 자리, 비어 있는 자리에 남아 있는 그 무엇이 다시 시작하는 밑거름이 됨을 텅 빈 들판을 보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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