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저절로 자란다
아이들이 어릴 때 TV를 없앴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었다. 손만 뻗으면 책이 손에 닿게 했다. 엄마, 아빠도 책을 가까이했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책과 친구가 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효과는 대 만족이었다. 아이들은 더 많은 시간 책을 읽었다. 마음껏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보드게임도 즐겼다.
가족 모두의 저녁시간은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대화도 많아지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도 길어졌다. 주말이면 아무 계획 없이 어디든 떠났다.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연과 사람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했다. 스마트폰은 친구들보다 최대한 늦게 사줬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바라는 건 딱 세 가지였다. 건강한 몸과 책을 가까이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부는 그 세 가지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옳았다. 훌쩍 자라 20대의 복판에서 나름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아들, 딸이 보여 주고 있다. 무엇이든 스스로 알아서 척척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놀랍다. 무엇이 아이들을 키워 냈을까? 책이었다. 책과 여행이었다. 책과 여행을 통한 경험들이었다.
몇 년 전, 아들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가족이 순서대로 하루에 한편 씩 시를 써서 공유하자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4일에 한편씩 시를 썼다.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모든 사물에 감정이 이입되고 생각은 깊어졌다. 각자의 마음과 대상들이 시적 언어로 되살아 나고 은유와 묘사로 표현됐다. 색다른 감각과 통로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날들이었다. 거의 1년 동안 이어진 시 쓰기는 잠시 멈췄지만 조만간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작은 읍내지만 좋은 시설의 규모가 큰 도서관이 두 곳 있다. 가끔 도서관에 가면 아름다운 광경들이 선물처럼 럼 펼쳐진다. 도서관 한편에서 아이와 책을 보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의 모습은 고귀하다. 서가에서 이 책 저책을 끄집어 펼쳐보며 아이와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엄마의 모습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가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도서관은 늘 열려 있고 누구나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집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빠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정겨운 그림이다.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무슨 꿈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틈만 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에 빠져들지 않는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과 함께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백 마디 말보다 아이들을 빠르고 확실하게 변화시킨다.
다양한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농장으로 오기도 하고 학교로 가서 만나기도 한다. 활동을 하다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지켜본다. 쉬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관찰해 보면 아이의 미래가 조금씩 보인다.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일찍 온 아이들은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재잘거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4학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맨 앞자리에서 한 학생이 책을 읽고 있었다. 반가움 마음에 무슨 책을 읽고 있냐며 책 읽는 게 그렇게 좋은지 연달아 물었다. 그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 표지를 보여주고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슬쩍 열린 가방 속에는 교과서 아닌 다른 책들이 몇 권 더 들어 있었다. 흐뭇한 광경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농장에 방문한 초1 친구가 있다. 보기에도 얌전하고 안정돼 보인다. 목소리도 크지 않고 움직임도 소란스럽지 않다. 활동을 하는 시간에도 집중력이 남다르다. 쉬는 시간에 아이는 바로 책을 집어 든다. 떠드는 소리, 움직이는 부산스러움에도 아이는 책만 보고 있었다. 함께 온 다섯 살 동생도 책을 읽고 싶다며 아빠를 졸랐다. 아빠는 함께 책을 고르더니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두 아이들의 빛나는 미래가 보였다. 얼마 전, 유명 출판사에서 동시집을 펴내신 선생님께 부탁드려 그 아이들을 위한 친필 서명과 응원 글을 부탁드렸다.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간단하다.
책 읽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책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 언제든 손을 잡고 책이 있는 곳에 함께 간다. 어디든 갈 수 있으면 함께 떠난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아니면 이웃 동네 마실이라도 다니면 된다.
혼자 책을 찾아 읽고 홀로 여행을 다니는 날이 오면 아이는 제 몫의 인생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역할에서 이마저도 어렵다면 다른 어떤 쉬운 길이 있는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