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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Nov 28. 2024

사람들아!  이제 나도 읽고 쓸 줄 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의 시화 전시회를 다녀왔다.

겨울로 가는 길목, 비바람이 거센 날씨였지만 실내에서 이루어진 행사는 포근하고 흥겨웠다.

팍팍한 살림살이로 운영되는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 낸 감동과 결실의 흔적들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다.

반겨주신 분들과 서둘러 인사를 나눴다. 전시된 어르신들의 시와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읽히고 글을 배워 가슴속에 켜켜이 담아 두었던 한과 설움을 걸림 없이 토해 냈다.

말 못 할 사연들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삶은 저절로 시가 되고 어르신들은 시인이 되었다.

글자를 깨우쳐 이름을 쓰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의 황금기다.


누가 알까? 한평생 글 모르는 설움과 비참으로 살아온 세월을.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마주하는 많은 것들이 불편하고 막막했다.

입으로 말하는 건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았지만 글자를 앞에 두고는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글을 모르니 눈치는 빠를 수밖에. 대 놓고 말하지 않아도 무시하며 뒷말하는 줄 뻔히 알고 있었다.

힘든 나날들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월은 무심히 흘렀다. 유수 같은 세월이 무정하다 생각했지만 더 야속한 건 보이지 않는 멸시와 천대였다. 모진 세월 살아 내며 자식들 다 키워내고 손주들도 주렁주렁, 이만하면 괜찮은 세월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문맹의 생채기는 갈수록 짙어지고 깊어졌다.


저물어 가는 황혼 녘에 돌아보니 문명의 시대에 글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은 결코 온전한 삶이 아니었다.

글로 쓰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인 세상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여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쏟아 내지만 글을 모르는 까막눈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였다. 문맹의 한은 더 단단하게 맺히고 쌓였다. 남은 시간이나마 이 한을 풀어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읍내에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바람결에 들었다. 처음엔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보다 글을 가르쳐 준다는 한글학교의 문을 두드리기가 더 힘들었다.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며 체념하기도 여러 번. 살만큼 살았는데 이제야 글을 배워 어디다 써먹을 건지 막연한 마음은 더욱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글을 배우고 싶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한글학교에 다니는 게 마땅하다.

망설여지는 마음은 누군가 톡 하고 건드려 주면 터진다.

아들딸이 떠밀었다. 한마을에서 먼저 다니고 있던 언니의 권유로 따라나섰다. 남편의 응원을 받아 용기를 냈다. 어느 가게에 들러 글을 가르쳐 주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다.


한글학교는 시장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가파른 2층 계단을 올라가야 교실이 나온다.

교실의 크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칠판과 책상, 의자가 놓여있는 조그만 공간이 꿈속처럼 나를 반긴다. 이곳에 오기까지 7~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헌신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덕에 공부하는 즐거움은 배가되고 실력은 쑥쑥 늘어난다.

ㄱㄴㄷㄹㅁㅂㅅㅇ을 소리 내어 읽고 썼다. 반복해서 기억하며 배워나갔다.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깨우쳐 가며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와 가나다라마바사아를 읽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알아가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더 많은 글자가 눈에 띄고 써지기 시작했다.

시장에 널려 있는 간판들이 보였다. 00 상회, 00 헤어숍, 00 식당, 00 문구 등 말로만 듣던 가게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 정류장과 병원, 약국의 이름도 알게 됐다.

관공서와 은행 일도 혼자서 보러 갔다. 당당하게 내 이름 석 자를 써서 내 밀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세월이 거꾸로 갔다.

어릴 적,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학교와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하고 즐겁다. 한글을 익히면 단계가 올라가 수학, 영어, 한자도 배운다. 수학여행도 다녀오고 이곳저곳 견학과 체험 학습도 많다. 나이 들어 누리는 새로운 세상 경험들이다.


글을 알게 되고 자식 손주들에게 직접 문자를 보낼 때 가장 기뻤다. 세상살이 두려움이 없어졌다. 누가 뭐라 해도 꿀리지 않을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에 살맛이 났다.


스스로 글을 깨친 삶은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낯설고 힘든 여정의 길잡이가 되어 주신 선생님들의 헌신과 열정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화전에서 만난 빛나는 마음 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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