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그치질 않았나 봅니다.
추수 앞둔 가을들녘이 점점 울상이 되어갑니다.
내 친구네 과수원의 사과들도 남극의 빛을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오늘은 백년손님이 오신다니,
솔직히 그 손님보다는 딸려오는 유노와 비단이 만날 일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날입니다.
늦잠대장인 할머니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꼬맹이들이랍니다.
곧이어 폭탄투하라도 된 듯한 집으로 변신을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정리를 합니다.
남편은 애장품인 오디오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습니다.
부엌으로 간 나는 오늘의 메뉴대로 냉장고를 점검하고, 햅쌀도 씻어 놓습니다.
거실에서 남편의 영혼 없는 외침이 들려옵니다.
- 힘든데 있는 것들로 그냥 먹입시다.
사실 추석날 며칠 전부터 내 마음은 심통이 나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엄마들은 사는 동안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헤매어야 하는 것일까?
멀쩡하게 잘 있는 남편에게,
걸리기만 하면 쪼아댈 것 같은 까마귀의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답니다.
죄 없는 남편은 괜히 풀 먹은 강아지처럼 살금살금 꼬리를 내리고 있었답니다.
아, 이런 것이 명절증후군인가 봅니다.
오늘은
그 명절증후군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하군요.
나의 부엌에는 음악이 흐르고,
꽃무늬의 앞치마를 고쳐 매고 있는 세프가 등장했으니까요.
백년손님을 위한 갈비찜이 익어갑니다.
추석 다음날의
슬기로운 노년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