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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내 생의 바다(3) - 폭풍의 바다

견고하게 날카롭게 벼리는 시간

파도는 바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얼마나 밋밋할까. 그저 끝없이 푸르기만 한 바다는 강이나 호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하얀 포말을 쉴 새 없이 일으키는 파도가 있어 바다는 언제나 살아서 펄떡인다.


나는 폭풍 치는 바다를 좋아한다. 폭풍 치는 바다에 서면 정신이 번쩍 든다. 세찬 파도가 머리를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대는 요란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귀가 멍멍해지고 머릿속이 웅웅거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만 같다. 그렇게 한참 폭풍 치는 바다에 서 있으면 찬물에 샤워라도 한 듯 온몸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동해의 바다는 언제 가도 좋지만 폭풍 치는 여름의 동해 바다는 잊을 수가 없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동해안에서도 백미는 강릉의 헌화로와 삼척의 이사부길이다. 헌화로는 금진해변에서 정동진항까지 2.4km, 새천년해안도로라고도 부르는 이사부길은 삼척해수욕장에서 삼척항까지 4km 정도 되는 길이다. 두 길 모두 한쪽으로는 기암절벽을, 다른 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다. 


바다 옆으로 바짝 붙은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달리다 보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절경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파도가 거센 날이나 폭풍이 치는 날엔 하얀 파도가 도로에까지 넘어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언젠가 동해안의 7번 국도를 따라 여행할 때도 그 도로에 폭풍이 몰아쳤다. 도로 위로 하얗게 흩어지는 포말과, 그깟 파도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뚝 선 바위. 그 좁은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스릴이라니. 


그 여름, 폭풍 치던 화진포 바다는 또 어떤가. 고성에서도 최북단에 가까운(명파해수욕장이 가장 최북단에 있다) 화진포해수욕장은 내가 가 본 해수욕장 중에서 최고로 꼽는 곳이다. 화진포해수욕장은 위치 덕을 단단히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좋은 해수욕장이 그렇게 호젓할 수 있다니. 아마도 많은 해수욕장이 이어진 동해안에서도 북한과 가까운 위쪽에 자리를 잡은 까닭이리라. 그 때문인지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상가나 펜션 같은 건물도 많지 않다. 내가 처음 간 십여 년 전엔 건물이라곤 콘도 한 채밖에 없었다. 당시엔 군사보호지역이라 일반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화진포해수욕장을 첫째로 꼽는 또 다른 이유는 호젓한 분위기와 함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해수욕장과 호수를 함께 볼 수 있는데, 석호인 화진포호가 해수욕장과 거의 붙어 있다. 석호는 퇴적된 모래가 만의 입구를 막아 생긴 호수로, 동해안 지역에 발달해 있다. 강릉의 경포호, 속초의 청초호, 영랑호도 모두 석호다. 화진포호는 우리나라 석호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또 화진포에는 호수뿐 아니라 생태박물관과 김일성별장,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 등 볼거리도 많다.  


폭풍이 치던 그날, 해수욕장 위쪽 언덕에서 바라본 모습은 장관이었다. 가운데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바다가, 한쪽에는 호수가 펼쳐진 이색적인 풍경. 푸른 바다 위엔 거센 바람이 만든 파도가 하얀 크림을 발라 놓은 것처럼 넓게 덮여 있었다. 




서해에도 동해 못지않은 해안도로가 있다. 바로 영광의 백수해안도로다.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77번 국도를 따라 가는 16.8km에 이르는 길로,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짙푸른 바다와 수평선, 기암절벽을 볼 수 있다. 또 전망이 좋은 곳마다 정자와 벤치가 놓여 있으며 멀리 칠산도, 송이도, 안마도 등이 보인다. 바다 가까이서 데크를 따라 걸을 수 있는 '해안노을길'도 있다. 


언뜻 사진으로만 보면 동해 같지만, 동해와 다른 점은 환상적인 일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을이 얼마나 좋으면 '노을전시관'과 '노을전망대', '노을종'이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노을전망대에는 칠산도에 서식하는 괭이갈매기의 날개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사진 스폿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흔히 서해에는 파도가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겨울 찾은 백수해안도로에서는 동해 못지않게 거센 파도를 만났다. 폭풍 치는 겨울바다는 추위를 잊게 만들었다. 두터운 겨울옷을 여미면서도,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시린 눈을 부릅뜨면서도, 바다를 바라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폭풍 사이로 노을까지 번지고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폭풍의 바다를 품은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해가 드나들기를 여러 차례. 회색빛 구름은 붉은 기운을 머금었다가 이내 검어지는가 하면, 어느 순간 작은 틈을 내주며 신의 선물 같은 빛내림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와 구름이 만들어낸 천지창조 같은 노을이 내린 그날, 귀를 얼얼하게 하는 추위도, 일상을 지루하게 물들이던 권태도 모두 잠시 사라지는 듯했다. 폭풍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뇌리를 때렸고, 무디게 눙쳐 있던 마음속의 무엇들이 날을 벼리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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