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환기 겸 가볍게 청소를 했다. 정확히는 정리였다. 나는 굿즈나 티켓 등등을 받아두곤 한 곳에 모아두곤 하는 버릇이 있었고 오래도록 치우질 않자 난잡해졌다. 인생네컷을 찍어둔 사진이나 연극을 보고 난 후의 티켓, 팝업스토어에서 받아온 굿즈 등 다양한 것들이 지저분하게 서랍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씩 치우다 어떤 인생네컷이 눈에 들어왔다. 전 여친도 아니고 전전 여친이라니. 내가 얼마나 오랫 동안 정리를 안 한 걸까. 이건 안 들킨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신기했던 건 정말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추억으로 회상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그냥 찍었던 사진. 언제 찍었는진 모르겠지만 다정해 보이는 커플처럼도 보이는, 그런 사진.
의상으로 봐선 여름 쯤 되었던 거 같고. 하나면 실수인데 두 개면 뭘까. 하나는 인생네컷 사진이었고 하나는 그 친구의 단독샷이 들어있는 사진이었다. 아마 그 친구가 가지라고 내게 줬던 거겠지. 지금이나 그때나 이런 선물은 원하지 않는다. 군대 시절에도 난 연예인 사진을 거는 걸 싫어했으니까.
선물로 사뒀던 엽서도 보였다. 1년 전 여름, 광주에 갔을 때였다. 좋아할 거 같아서 샀던 엽서를 1년이 지나도록 묻혀만 있었다. 1년도 더 지났구나.
바쁘다는 핑계로 무던했던 거 같다. 사실 그렇게 바쁘지도 않은 거 같은데. 그냥 이것저것 찍다 보니 시간이 쑥쑥 지나가고 있다. 유의미한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 여유가 생기는 것도 있는데 보톡스를 잘못 맞은 탓인지 발음이 좀 굳고 있다.
정확히는 몇몇의 발음이 잘 안 된다. 입을 크게 벌릴 때마다 뭔가 걸리는 느낌이랄까. 처음부터 보톡스 같은 건 맞지 말았어야 했나. 처음 맞을 때는 별 지장 없었는데.
두 번째 맞은 지금에 와서야 이런.. 쓰레기 정리하듯이 필요 없는 것들은 다 버리고 싶은데
청소를 하다 보니 버릴 것들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난 잘 버리질 않는다. 기숙사에 살 때는 학기마다 강제로라도 버리게 되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하는 탓인지 잘 안 버리게 된다. 이젠 이사갈 때만 버리게 되려나.
교수님에게 연락이 왔다. 학과 행사가 있다고.
평소 같으면 가지 않겠지만 대학원 원서를 접수해버렸다.
카톡을 켜면 생일인 사람들의 목록이 뜬다. 익숙한 이름이 위에 올라왔고 생일 축하 문자를 보냈다. 곧 이어서 오는 답장.
아니 갑자기 연락을 주시고 감사합니다
날 추운데 서로 건강 잘 챙깁시다 호호
어라? 나한테 반말하던 형이었는데 뭐지 싶었고.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이름이 달랐다. 내가 찾는 사람은 강현구였고 이 사람은 강현규였다. 구와 규. 획 하나 차이라니.
순간 머쓱해졌지만 문자 대화라 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잘 마무리 지었는데 누군지 도저히 기억나질 않았다. 느낌만 봐선 옛날 백일장에서 봤거나 문창 실기 준비 중일 때 만난 사람 같은데.
이번엔 아주대학교 학생들의 단편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시나리오를 어제 읽어 봤는데 주인공이 문예 공모전에 참가하려고 했다. 나는 그런 주인공을 향해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하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쉽게 흔들렸고 이내 글을 포기한다.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문창과 실기 준비했던 옛날이 생각나서일까. 난 사실 포기는 안 했다. 실기에 떨어진 거지. 그래서 본교에 입학하고도 실기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동국대에 시험 보러 갔었다. 당시 85000원인가 하는 수시 원서 접수비가 붙었다. 굉장히 부담됐다. 그래서 원서를 동국대만 썼다.
사실 지금도 그 사실이 아쉽다. 돈이 있었다면 시험을 다른 학교도 보는 건데. 시험도 보지 못 했다는 그 자체가 그냥 안타까웠다. 난 왜 자존심이 먼저였을까.
돈에 대해선 유독. 자존심이 뭐라고. 근데 그 자존심마저 버리면 내게 남은 걸 뭘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