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토 Dec 04. 2022

타임 패러독스 (2014)

패러독스 없는 패러독스 영화. 포스터는 무시하세요


이 영화도 예전부터 관심은 갔으나 포스터가 너무 매력을 떨어뜨렸던 작품인데, 오히려 반전 영화라고 홍보하는 게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궁금하지도 않고... 하지만 막상 보니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게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에 들어오면서 <타임 패러독스>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원제는 'Predestination'입니다. 운명이 예정되어있다는 뜻인데요, 시간 여행을 해서 아무리 미래를 바꾸고자 해도 정해진 길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죠. 테넷에서 나왔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해도 거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스포 없는 후기가 전혀 불가능한 수준인데요, 영화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는 것은 제목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원제 대신 '타임 패러독스'라는 제목으로 들어오면서 그 힌트마저 사라져 버렸네요... 마땅한 번역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로버트 하인리인의 <당신은 모두 좀비들>이라는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요, 10분 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소설이라 영화를 본 후에 원작도 맛을 보고 왔습니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에 완벽한 기승전결과 놀라운 상상력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원작과 영화는 한 가지 추가된 이야기 말고는 거의 동일합니다. 짧은 글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음에도 한 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 (영화 치고는 짧지만)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풀어갈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게 너무나 놀랍습니다.



<타임 패러독스>라는 제목과는 달리 사실 패러독스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패러독스가 무엇일까요? 유명한 할아버지의 역설을 예시로 들어 봅시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나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나는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를 죽인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요? 선택에 따라 우주가 갈라진다는 세계관에서는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아버지를 죽이면 할아버지가 죽은 우주,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우주가 나누어지는 것이죠. 내가 없는 세계, 내가 존재하는 세계가 동시에 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주가 단 하나뿐이라면 모순을 해결할 방안은 없어집니다.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순간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러면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존재했던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것조차 없어져야 하는데, 나는 분명 살아있었습니다.


다중우주를 상정하지 않는 경우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꾼다면 모순이 생깁니다. 미래가 바뀌기 전 원래의 내가 겪었던 일은 무엇이 되는 걸까요?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순인 거지요. 모순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야만 합니다. 특정 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두 결정되어 있고, 과거로 가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일어날 일을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역할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정설, 결정론, 숙명론.. 여러 가지 말로 부를 수 있지만 그 결정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각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일단 설명은 넘어가고 '결정론'이라고 통일하도록 할게요.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 종류의 시간여행물 중 결정론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가 최고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스스로 페널티를 걸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우개를 절대 쓰지 않고 복잡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시간의 앞뒤를 어떻게 꼬아 놓든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배치하는 능력에서 작가나 감독의 역량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가장 고도화된 수준의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이 들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너무 경이롭고 재미있습니다.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영화를 볼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절대 절대 스포일러를 밟지 않기를 추천드립니다.




타임머신을 통해 범죄를 막는 집단인 템포럴 요원의 일원인 주인공은 폭탄 테러범 '피즐바머'를 잡기 위한 작전 도중 큰 화상을 입고 피부이식으로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됩니다. 회복 후 70년대의 바에 위장 잠입한 템포럴 요원은 거기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습니다. 잡지에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그 남자는 사실 제인이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태어났습니다. 제인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후 아이를 가졌는데 남자는 떠나 버렸죠. 아이를 낳으면서 제인은 사실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모두를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제왕절개 도중 위험에 처하자 여성의 생식기를 제거하고 덜 발달했던 남성 생식기를 복원하여 제인은 존이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낳은 지 얼마 안 된 딸아이가 납치되었고, 제인은 납치범이 아이의 아빠라고 확신합니다. 


템포럴 요원은 아이 아빠를 찾아 죽이고 싶었던 제인(존)을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조직으로 영입하기로 하지요. 템포럴 요원은 존을 아이 아빠가 나타나는 시간대로 데려다주는데,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고, 존은 제인이 사랑했던 그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같은 사람인 존과 제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템포럴 요원이 납치하여 45년의 고아원으로 데려다 놓지요. 그 아이는 제인이 됩니다. 존은 제인을 떠나야만 했고, 주인공을 따라 템포럴 요원이 됩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사고를 당하고, 피부이식을 받고, 과거로 가 바에 위장취업을 하고 젊은 자신을 만나고... 모든 일은 이렇게 반복되게 되지요. 마치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영화는 계속해서 힌트를 줍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템포럴 요원이 존에게 묻는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일까?"라는 질문이나, 중간에 삽입된 "나는 나의 할아버지"라는 노래 가사만 봐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어요.  제인 = 존 = 제인의 딸 = 템포럴 요원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인 반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예상 가능했네요. 그래도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역시나 짜릿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보이는 관계를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만드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뛰어나서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원작의 내용과 동일하고, 영화에서 추가된 점은 피즐바머 = 주인공이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을 템포럴 요원에 영입하는 것을 성공한 후 계속해서 피즐바머의 단서를 쫓던 주인공은 한 세탁소에서 피즐바머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미래의 나이 든 자기 자신이었죠. 피즐바머는 요원에게 네가 나를 죽였기 때문에 네가 내가 된 거라며, 나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원은 절대로 그처럼 되지 않겠다며 미래의 자신을 죽이죠.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전까지 나온 모든 내용은, 템포럴 요원이 과거의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일어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수를 원하는 존에게 끔찍한 진실을 알려줘야 하지만 그를 제인 앞에 데려다 놓으면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고, 마음이 찢어지지만 자신의 딸이자 자기 자신인 아기를 납치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고아원에 데려다 놓아야만 하지요. 그 모든 것은 자신이 겪은 일이었으니까요. 일어났던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모순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원형의 인과관계 속에 그의 삶은 마치 무한히 반복되는 지옥 같습니다. 


무한루프를 돌고 있다는 것 말고도 그의 삶은 40년대~70년대에 가족 없는 고아이자 여성이자 미혼모이자 성전환자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굴곡들이 그 자체로 끔찍했습니다. 바에서 존이 들려주는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나 기구했어요... 이후 템포럴 요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도 그는 결국 그 자신의 삶이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도록 도울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반복되는 소수자와 약자들의 힘겨운 삶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피즐바머를 죽이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이때 주인공은 진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 보입니다. 피즐바머를 죽이느냐, 죽이지 않느냐는 현재 주인공의 시점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본인이 겪은 일이기 때문에 일어나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피즐바머를 죽이게 됩니다.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는데도요. 그는 미래 자신의 끝을 보았습니다. 끔찍한 범죄자가 되어 자기 자신의 손에 죽는... 자신의 마지막을 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정신은 점점 붕괴될 것이고, 스스로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피즐바머를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피즐바머가 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공은 피즐바머를 죽이겠죠. 이 세계의 전제 자체가 미래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여기에서 저는 결정론적 세계에서의 무력함을 봤습니다. 테넷이나 컨택트와는 다르죠. 일어날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행함으로써 일어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과, 운명에 떠밀려 특정한 선택만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릅니다. 이 영화는 피즐바머 설정을 통해서 후자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제목인 predestination은 신학에서의 '예정설'을 말해요.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인간의 미래. 신이 미리 짜 놓은 운명의 바둑판 그 위에서 무력하게 움직여질 수밖에 없는 인간... 


그러나 전자의 특성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템포럴 요원은 운명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자가 아닙니다. 사건이 모순 없이 일어나도록 그는 직접 움직여야만 하지요. 이 영화가 너무 재미있는 점은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적 세계의 모순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신의 장기말이나 다름없다는 것. 세상을 구하는 요원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파괴하는 테러범일 수 있다는 것. 영화에서 추가된 이 설정이 단순히 반전을 한 번 더 보여주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내용 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오직 두 명의 인물(사실 그것도 한 명인)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존=제인을 연기한 사라 스누크는 혼자서 남성과 여성 배역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했는데, 사실 저는 여성 배우라는 것을 스포 당한 상태였지만 아니었다면 정말 몰랐을 것 같아요. 후반부의 두 명의 템포럴 요원과 피즐 바머로서의 두 명의 에단 호크의 대치 상황도 짧은 순간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었고요.


결국 모든 인물은 같은 사람이었는데, 다른 시간대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제인, 존, 템포럴 요원은 각기 다른 사람이기도 합니다. 도가에서 말하는 변화와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는 호접지몽 이야기에서, 그 둘은 완전히 섞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인지 모르는 관계에서 장자는 장자로서의 개체성을, 나비는 나비로서의 개체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주전공도 아닌 학부생 수준 지식이라 이 연관성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기는 어렵네요... 어쨌든




총 10회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어쩌다 보니 9회차로 이렇게 <내가 아직 씨네필이 아니지만> 시리즈는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제 조금 쉬다가 새해가 되면 다시 시즌2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너무 신기한 게, 제가 리뷰를 쓸 때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내용은 전부 영화를 보는 중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란 겁니다. 브런치를 켜고 글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도요. 무슨 말이라도 쓰다 보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결론으로 끝을 내게 됩니다. 절대 전문 비평가 수준에 비할 수 없고 글솜씨도 좋은 편이 아니지만 원래 정말 생각 없이 영화를 즐기는 대중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요. 그러니 지금까지 글을 쓰지 않았을 때는 영화를 반밖에 즐기지 못했던 것 같네요. 


SF도 정말 다양한 하위 장르가 있어서 최대한 겹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영화를 들고 와 보려고 했는데, 그냥 매주 갑자기 보고 싶은 영화를 보다 보니 성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9편 정도로는 포괄할 수 있는 게 너무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여러모로 많네요. 하지만 이것으로 시작해서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어 기쁩니다! 시즌2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써볼까 생각이 들면서.. 그래도 제 취향대로 결국 SF가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요.. ㅋㅋ큐ㅠㅠ



그럼 진짜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 다들 감사드리고 행복한 연말 되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미지와의 조우 (197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